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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신라인의 유별난 곱돌사랑
작성자
이은석 연구관
게재일
2016-08-18
주관부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회수
1044

 


  경주 시가지유적을 발굴하면 반드시 출토되는 유물이 있다. 전국 어느 발굴현장에서도 이 유물이 출토되면 통일신라시대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유물은 무엇일까? 바로 곱돌(납석, 蠟石)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이다. 손잡이가 달린 약탕기 형태, 차를 끓이는 소형 주전자, 솥, 종지 등 용기류가 가장 많고, 무게를 다는 추, 각종 장신구와 예술품, 인장과 남근석까지 출토되고 있다. 심지어 화장한 뼈를 담은 단지도 곱돌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곱돌 사랑은 언제부터일까? 신라는 통일전(676년)까지 곱돌로 만든 유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경우 부여 군수리절터에서는 6세기대 곱돌로 만든 불상(보물 제329호)이 있어 삼국이 통일되면서 돌을 다루는 기술이 유입되어 신라 문화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본다. 감은사, 불국사와 석굴암 등 수많은 석불과 석탑은 통일신라를 ‘돌의 나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예배의 대상과 예술품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신라인은 최고의 맛을 곱돌에서 뽑아내었음이 출토유물로 증명되고 있다. 특히 경주 월성과 황룡사지 주변 등 중심지에서 곱돌유물의 출토빈도수가 훨씬 높아 귀족들의 애용품이었음이 틀림없다.


  9세기 초 당나라 학자인 한유가 돌솥을 예찬하는 시를, 11세기 말 소동파는 물을 끓이기에 돌솥이 가장 좋다고 읊었고『구지필기』에는 골동반(骨董飯, 비빔밥의 한자 표기)도 언급되어 있다.『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상으로 돌솥을 하사했으며, 영조때 실학자 유중림은 밥 짓는 솥 중 가장 좋다고 했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돌솥에 시를 적어 자신의 소유임을 밝혔다고 한다. <음식에 담긴 우리네 삶과 역사>의 작가는 앞의 기록으로 볼 때 돌솥비빔밥이 1천년 이전부터 진화했다고 한다.


  결국 가장 오래된 기록이 9세기부터라면, 돌솥도 밥맛도 통일신라에서 당나라로 수출된 것이 아닐까? 한식의 대표격인 돌솥비빔밥은 전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 LA에서는 데워진 돌솥은 별도 매뉴로 하고 각종 채소나 고기류를 자유로이 선택해서 올려 먹는 방식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메뉴선택권이 없는 돌솥비빔밥의 ‘국제적 진화’라고나 할까. 말복이 지난 오늘 저녁은 곱돌판에 항정살과 김장김치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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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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