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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600년 유교 성지, 성균관과 문묘
작성자
조상순 연구관
게재일
2016-06-16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조회수
2837

 


  옛 한양도성의 동북쪽 소문(小門)인 혜화문으로 가는 길에는 600년간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던 성균관(成均館)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선현(先賢)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文廟)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가 있어, 흔히 성균관이라 부르고 있지만, 엄연히 문묘라는 제사시설과 성균관이라는 교육시설은 별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성균관에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에 명륜당이 서 있고, 그 좌우로 학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런데 마루가 앞에 있어 오르내리게 되어 있는 명륜당과 달리, 동재와 서재는 마루가 마당을 등진 채 건물의 뒤쪽에 놓여 있다. 왜 그럴까.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치러진 의례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선현에 대한 제사는 석전(釋奠)이라 하여 임금이 직접 제사에 참여하였고, 성균관에서 열린 특별 과거시험에는 임금이 참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이 머무는 동재와 서재의 마루가 명륜당 쪽을 향하게 될 경우, 임금이 왔을 때 학생들의 침구며 옷가지 등이 임금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동재와 서재는 마당을 향해 벽을 두게 된 것이다. 이곳만 아니라, 문묘 제사 때 헌관들이 모여서 제사를 논하는 향관청의 동서 월랑(月廊) 역시 마당을 등지고 서 있다.



  특이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지방 향교(鄕校)에서는 공부를 하는 명륜당이 앞에 오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뒤에 놓인다. 성균관과 문묘는 이와 반대로 앞에 대성전이 있다. 이에 대하여 성균관의 역사를 담은 ‘태학지(太學志)’에는, ‘성묘가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어, 공자와 맹자가 앞에 있고, 정자와 주자가 뒤에 있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마치 제자가 선생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향교는 경사진 구릉지에 놓여 대성전이 뒤에, 정확히 말하면 ‘위’에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존중하고 숭모하는 ‘존숭(尊崇)’이 건물의 배치와 모양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 서울 문묘와 성균관 전체는 사적으로, 대성전과 명륜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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