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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숭동 대학로에서 옛 대학의 발자취를 짚어본다
작성일
2017-07-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695

독립을 위한 교육, 민립대학설립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이상재를 비롯한 민간 지도자들이 조선에 민립대학(民立大學) 즉, 사립대학을 세우려 하자 일제가 관학(官學)으로 설립한 것이 경성제대이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반드시 교육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이 필요함을 제창한 민립대학설립운동.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되고 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 모금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자 일제는 1922년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2년 후, 경성제국대학관제를 공포했다. 같은 해 예과가 개설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만들어 학생을 유치했다. 이후로도 노골적인 탄압은 계속되어, 민립대학기성회 구성원을 감시하고 강연을 중지시켰다. 문화운동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3·1운동 이후 민족을 단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독립적인 국가를 형성하는데 교육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각인시켰다.

일제는 도쿄제국대학이 있는 상태에서 일본과 대만 그리고, 조선에 제국대학을 아홉 개 더 세웠다. 그중 1924년 5월 2일에 개교한 경성제대는 여섯 번째였으며 이 모든 것은 식민 지배를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다.

동숭동에 터를 잡은 경성제국대학

경성제대의 교사(校舍) 위치로 영등포, 노량진, 청량리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동숭동, 연건동 일대로 결정됐다. 캠퍼스는 총독부의원 구내 연건동 대지 66,000평과 동숭동 쪽 민유지 25,000평을 확보해 형성했다. 이 땅은 본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소유한 포도원이었다.

1925년 8월 14일 동숭동 일대에서 학교 건물의 착공이 시작됐는데, 경성제대의 학부 개설 추진은 1924년 예과 개설 직후부터 진행됐다. 학부 건물 설계는 조선총독부의 이와쓰키 요시유키(岩槻善之) 기사가 주도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당시 최고 책임자였다. 이와쓰키는 경성제대 본부와 법문학부, 의학부, 부속의원 등의 신축 설계와 감독을 병행했다.

캠퍼스의 중심은 법문학부와 의학부였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풍을 따랐으며, 이는 엄격과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도쿄 분쿄구(文京區) 혼고(本鄕)에 있는 도쿄제대 교사들과 유사했다.

법문학부 건물은 1928년 동숭동 공업전습소 이웃에 세워졌고 부속도서관 등도 1926년~28년까지 모습을 갖췄다.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마로니에 광장을 조성하고 좌우에 새 교사들을 세워나갔는데, 처음부터 이공계는 배제됐다.

현재 대학로에서 본 건물 우측

우리 건축가 박길룡, 설계에 참여

본부 건물은 1930년 착공해 이듬해에 준공됐다. 캠퍼스에서 가장 조형적인 이 건물은 평·입면 모두를 자유스럽고 부드럽게 계획했다. 구조는 벽돌 조적조인데 표피는 황갈색 스크래치 타일로 마감했다. 스크래치 타일은 면을 거칠게 처리한 치장 타일인데, 미국 건축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일본 도쿄제국호텔에 처음 사용했다. 이는 1920년 후반부터 조선 땅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관 중심부와 창 부분에 반원 아치가 미학적으로 쓰였으며 부분적으로 아케이드(아치 모양으로 설치된 노상시설)화 했다.

교사는 3층으로 설계됐고 일부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본관 내부로 진입하는 부분은 1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2층이다. 평면으로 봤을 때 1층은 창고와 기계실을, 2층은 학사 사무를 처리하는 여러 실을 배치했다. 총장실은 3층 좌측에 있었다.

설계는 조선총독부에서 했지만 건축가 박길룡(朴吉龍,1898~1943) 씨가 실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조가 주가 되고 벽돌과 목재를 겸용했다. 벽면은 법문학부와 같이 황갈색 거친 타일을 발랐고, 현관 포치(출입구의 바깥쪽에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와 아치창도 그에 따랐다.

본부 건물의 또 하나 특색은 전면부를 단계적으로 체감(遞減)하며 후퇴시켜, 입체감이 있다는 점과 일부분에 곡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옥상부는 법문학부와 같이 평 슬래브(철근 콘크리트조 바닥판)로 했고 파라페트(물넘침이나 추락 등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낮은 벽체)를 둘렀다. 위생설비로는 수세식 정화장치를 설치했다. 공사는 일본인 회사 미야카와구미(宮川組)가 맡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곧이어 시작된 미군정이 1946년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을 발표하면서 경성제대는 오늘날의 서울대학교로 바뀌게 됐다.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1월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이 유서 깊은 캠퍼스 대지는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매각됐고 본부 건물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양도됐다. 그리고 캠퍼스 앞의 도로는 ‘대학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한주택공사는 1981년 경성제대와 서울대로 사용했던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주택 단지로 분양했다. 이후 청량리 경성제대 예과 건물도 철거해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구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은 철거 분양 도중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78호로 지정(1981년 9월 25일)되어 그나마 동숭동의 마지막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글+사진‧김정동(우리근대건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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