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페이지 경로
기능버튼모음
본문

문화재 기고

제목
조선 르네상스의 조연 정우태
작성자
황정연 연구사
게재일
2016-04-07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조회수
1674

 


“어허, 참으로 뛰어난 솜씨로구나. 네가 좋을 꿈을 꾸고 이 돌을 얻었다지?”
“그러하옵니다.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화산(花山, 융건릉 뒷산)에 좋은 돌이 있다고 알려주기에 깨어나서 구해보았더니 과연 큰 돌 4개를 얻었습니다. 장명등은 바로 그 돌로 만든 것입니다.”


  1798년 2월 4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완성한 뒤 현장을 방문해 석물공사를 담당한 정우태(丁遇泰)를 만나 나눈 대화이다. 두 사람은 ‘꿈’ 덕분에 우연히 좋은 돌을 얻은 듯 우스개로 말했지만, 정조는 정우태가 최상품 석재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우태가 만든 현륭원(융릉) 장명등(왕릉에 놓인 석등)은 알맞은 비례와 참신한 도안, 입체감 있는 조각으로 역대 장명등 중 가장 뛰어난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타고난 솜씨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신분 탓이었던지 정우태의 출신과 생졸년에 관한 기록은 변변치 않다. 그러나 평소 그의 실력과 성실함을 눈여겨 본 정조에 의해 발탁된 이후 약 30년 동안 왕실의 토목공사, 기물과 공예품 제작 등을 주관하며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현륭원 장명등은 인재를 알아본 정조의 ‘눈’과 그러한 임금의 속뜻을 이해하고 진심을 다한 정우태의 ‘마음’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정우태는 1794년 정조의 명으로 경복궁 흠경각을 수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흠경각은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신분을 초월해 재능을 인정받는 장영실의 자취가 담긴 흠경각을 정우태가 훗날 다시 손 본 것은 우연이었을까.


  정조가 이끈 18세기 조선르네상스의 조력자였던 정우태. 사회적 냉대를 받던  ‘흙수저’로 태어난 그는 자신만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진정한 ‘금수저’로써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아무리 흙이 견고하게 쌓였다 하더라도 땀방울이 모이면 언젠가 허물어지게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설명사진


<정우태가 만든 현륭원(융릉) 장명등>


첨부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