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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의 현장에서 - 서울역사를 둘러보며
작성일
2005-07-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400

 일제의 욕망이 집약된 서글픈 상징물

서울역사(驛舍)를 둘러보며


   서울역광장을 걸어가는 동안 서울역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사 주변 여기저기에 앉거나 누워 있는 노숙자들이었다. 초췌한 얼굴에 남루한 복장의 그들은, 현대적인 고속철도역사(驛舍)에 그 기능을 물려주면서 한 시대를 마감한 옛 서울역사의 모습과 함께 역 주변의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노숙자가 경제 번영의 시대가 남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의미한다면, 서울역(당시는 ‘경성역’)은 일본제국주의의 군사·경제적 욕망이 집약된 일제강점기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대륙침략의 발판을 다지기 위해 한반도를 종횡으로 긋는 철도망을 구상하였다. 서울역은 그 모든 역의 중심이 었고, 일제 식민통치의 핵심적 역할을 감당했던 현장임을 의미했다.
   때문에 일제는 서울역사를 그 역할에 걸맞은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바 있는 독일인 게오르그 라란데와 일본인 야스시가 공동으로 설계를 맡았는데, 야스시의 스승인 다츠노 깅고는 동경역을 설계한 바 있어 사람들은 ‘경성역’을 ‘작은 동경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3년 2개월의 공사기간에 공사비는 총 94만 5천원이나 들었다. 그나마 공사비가 모자라 원래 규모의 2/3로 축소된 것이라 한다. 당시 경기도의 한 해 토목비 예산이 50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서울역 공사에 일제가 들인 공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7만여 평의 부지 위에 연건평 2만여 평,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서울역사는 중앙에 비잔틴양식의 돔을 얹은 큰 홀을 두고 좌우에 큰 그릴을 거느렸다. 석재와 벽돌을 혼용하여 마감한 외부는 물론 내부시설도 당시로선 최고급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2층의 ‘그릴식당’은 최초의 양식당으로, 당시는 물론 서울에 고급호텔이 들어서기 전인 70년대까지 서울의 명물이었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통치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서울역사를 보면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일본인들의 망언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을 다녀가는 많은 일본인들도 일제강점기가 남긴 흔적들은 보면서 혹 같은 생각을 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시기에 그들에 의해 이 땅에서 계획되고 실행된 모든 행위는 -정치·경제·교육 등- 일본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목적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 시기에 이 땅에 어떤 가시적인 제도와 시설이 늘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원의 수탈과 일본 상품 판매시장의 확대를 용이하게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성장을 도모한 것이지, 결코 우리 민족경제의 성장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민족경제는 몰락하고 한국의 민중은 더욱 빈곤해져 갔던 것이다.

   오늘날 분단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고통의 근원이 결국 일제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면, 서울역에서 만난 노숙자의 서글픈 모습과 그들을 만들어내는 잘못된 경제구조의 뿌리도 그 시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의 비약을 해보면서 서울역을 떠나는 길에 한 표지석을 보게 되었다.
   1919년 9월 2일 제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짐으로써 3·1운동 이후 고양된 조선민족의 독립의식을 잠재우려 내건 ‘문화통치’라는 거짓논리를 온 몸으로 거부한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었다. 서울역을 보면서 혹 망언에 사로잡히는 일본인이 있다면 조용히 보여주고 싶은 표지석이기도 했다.
정상택 / 장돌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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