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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부활한 능묘비, 소령원 신도비
작성자
황정연 연구사
게재일
2016-11-10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조회수
1112

 


  1456년 음력 1월 25일, 세조는 현릉(문종 능)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울지 여부를 두고 신료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문종의 국상을 치른 지 4년이 지났지만 그의 맏아들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현릉 신도비 건립은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세조는 신도비 건립을 불허하였다.


  신도비는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비석의 형태로, 왕릉이나 종2품 이상 고관의 무덤 근처에 세워 고인의 생애와 업적 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5세기까지 건원릉을 비롯해 선왕의 능에 신도비를 줄곧 세웠음에도 세조에 의해 전통이 단절된 후 왕족의 무덤에 신도비를 세우는 일은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했다. 대신 17세기부터 선왕․선후의 탄생과 사망일을 간략히 새긴 표석이 건립되었다. 


  약 250년 가까이 지켜온 신도비 건립에 대한 불문율을 깨트린 이는 영조였다. 그는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은 1725년 3월 모친 숙빈최씨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의 초입에 5m에 가까운 거대한 신도비를 세웠다(사진). 보통 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의 크기가 4m 정도인 사실을 감안하면, 소령원 신도비는 관례를 넘어 매우 육중하게 조성된 것이다. 석재를 운반하기 위해 만 명 이상 동원되었고 농사철이라 백성들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작업을 강행하였다. 국정운영에 있어 백성들의 입장을 가장 먼저 생각했던 영조에게 무수리 출신 모친의 위상을 높여 왕권의 명분을 찾는 것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소령원 신도비는 왕릉 신도비와 표석형태를 혼합해서 만든 독특한 예이자 역동적인 조각기법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귀대석 위에 비석 몸체를 세우고 그 위에 쌍룡이 엉켜있는 타원형의 이수(螭首)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데, 소령원 신도비는 한옥의 처마를 본 딴 비석머리에 용의 몸통이 어우러진 가첨석(加檐石)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소령원 신도비의 진정한 멋은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거북의 당당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개인적․정치적 역경 속에서도 영조가 화려하게 부활시킨 전통의 상징이자 통치철학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설명사진


<소령원 신도비, 1725년, 경기 파주>


 



설명사진


<소령원 신도비의 가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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