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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경주는 계획도시의 원조
작성자
이은석 연구관
게재일
2016-09-29
주관부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회수
1100

 


  추석 전 유래 없는 강진이 경주를 덮쳤다. 많은 가옥이 손상되었고 폭우까지 덮쳐 피해를 당한 시민들은 힘든 명절을 지내야만 했고 여진으로 지금도 힘들다고 한다.


  7세기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첨성대는 이번 지진으로 정자석이 5cm 정도 벌어지고, 북쪽으로 약 2cm 정도 기울어졌지만 1400여 년 동안 잘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신라인의 건축 기술은 신기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지진기록이 삼국시대 때 102회, 고려시대 때 169회, 조선시대 때 1,800회를 넘는다고 하니, 고려 이후로도 수많은 지진을 견딘 셈이 된다. 특히 혜공왕 15년(779년)때 집이 무너지고 100여명이 죽은 대형 지진도 이겨냈던 것이다.


  첨성대는 별자리 관찰 장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생활에는 어떻게 적용했을까? 신라인들은 북극성과 자오선 관찰을 통해 진북의 위치와 방위를 정확히 파악하여 경주 전 지역을 바둑판처럼 구획하고 신도시를 만들었다. 황룡사를 중심으로 140m 간격으로 구획하면서 동서·남북도로를 두어 사통팔달되도록 하였다. 도로 폭은 5∼23m 등 필요에 따라 자갈을 다져 만들었고 중앙에는 수레길을, 양쪽으로는 보도와 하수도를 갖추었다.(사진) 창원이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라고 알고 있지만, 신라시대부터 이미 구획화된 도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대 도시계획의 시원은 중국으로 일본 등 주변국가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우리 선조들은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즉 의도적으로 남북·동서방향에만 맞추지 않고 친자연적인 물길과 환경에 따라, 기존의 고분군을 보존하면서 도시를 조성했던 것이다. 정방형 구획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주는 도심을 다녀보면 자유로운 느낌으로, 방문객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와집 용마루와 추녀마루의 끝이 반전되며 올라가는 아름다운 곡선은 중국과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모습이다. 새로운 요소를 생활과 환경, 미적 감각에 맞추어 독특하게 발전시키는 우리 문화는 선조들이 물려주신 훌륭한 자산이다.


  이번 지진으로 기와집 등의 피해 뿐만 아니라 증후군 고통도 심하다고 하니, 빠른 지원과 복구가 절실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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