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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벽루 너머로 본 풍경, 부벽루와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작성일
2021-10-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642

부벽루 너머로 본 풍경, 부벽루와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01.부벽루연회도 浮碧樓宴會圖 (평안감사향연도 平安監司饗宴圖), 조선, 19세기, 가로 196.9cm, 세로 71.2cm, ©국립중앙박물관 02.평남평양 북성 전금문과 부벽루 ©국립중앙박물관

昨過永明寺(작과영명사) 어제 영명사를 지났다가
暫登浮碧樓(잠등부벽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성공월일편) 빈 성엔 달 한 조각
石老雲千秋(석로운천추) 오래된 바위엔 천고의 구름
麟馬去不返(인마거불반) 기린마는 가서 돌이오지 않는데
天孫何處遊(천손하처유)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는가
長嘯倚風磴(장소의풍등) 길게 휘파람 불면서 돌계단에 기대니
山青江水流(산청강수류)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벽루 浮碧樓]


조선 후기 ‘인생샷’은 평양에서

조선 후기 평양은 사대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기를 소망하던 도시였다. 특히 평양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지역으로 풍요로운 도시의 대명사였고, 역대 왕들이 대동강 유람을 위해 들르던 절경으로 유명한 성지였다. ‘제1누대(第一樓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을 정도로 최고의 전망대로 불린 연광정(練光亭)은 관서팔경(關西八景)중 하나로 꼽혔고, 부벽루(浮碧樓)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꼽혔다. 고려와 조선의 문인, 중국 사신들을 막론하고 대동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많은 시가 『평양지』와 『평양속지』에 남아있다.


부벽루는 평양 금수산 모란봉 기슭의 대동강가 절벽인 청류벽에 접하고 있어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누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밤 풍경이 아름다워 평양팔경 중 제2경 부벽완월(浮碧玩月, 부벽루에서 본 달밤의 풍경)로도 불린다. 원래 부벽루는 393년 고구려 광개토왕 3년에 창건한 영명사(永明寺)의 부속건물인 영명루(永明樓)로 알려졌다. 이후 고려 예종이 순행을 할 때 그 아름다움을 빗댄 ‘부벽루’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려의 문인 김부식과 김극기가 남긴 시 속에 부벽루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어 적어도 12세기에는 부벽루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부벽루는 평양성 북성(北城)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곳으로 사용되다가 불에 타 버렸고 1614년(광해군 6) 감사 김신국이 중건(重建)하였다. 이후 6·25전쟁 시 폭격으로 파괴되어 1956년과 1959년 두 차례에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 북한의 국보유적 제17호이다.


03.평남평양 부벽루, 가로 16.4cm, 세로 11.9cm, ©국립중앙박물관 04.평남평양 부벽루, 가로 30.3cm, 세로 25.2cm ©국립중앙박물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경, 부벽루

부벽루의 아름다움에 얽힌 가장 유명한 일화는 고려 예종 때의 문인 김황원이 미완성으로 남긴 시 이야기일 것이다. 시와 문장을 잘 짓기로 유명했던 김황원이 평양을 방문하자 많은 사람이 부벽루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시가 나올 것을 기대하였다. 김황원은 부벽루에 올라 아름다운 풍광을 최고의 시로 답하고자 했으나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라는 단 두 줄의 시를 쓴 이후 밤이 새도록 시상(詩想)을 찾지 못해 한탄하며 그곳을 떠났다. 이후 많은 문인이 부벽루를 찾아 김황원이 남긴 미완의 시를 완성해 보고자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부벽루의 절경이 어떠했는지 그 명성을 짐작해 볼 만하다.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는 종2품 관리 평안감사로 부임한 이를 환영하는 잔치 장면을 그린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등 석 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 점을 통틀어 총 2,509명이라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등장할 정도로 풍성한 잔치 장면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연회와 행사의 내용을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조선 후기 기록화의 특징을 보여주면서도 조선 후기 평양의 지역적 특색과 평안도 사람들의 삶과 풍류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는 사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작품은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가 그린 것으로 전해졌으나, 서명과 낙관이 전형적인 김홍도의 것과 달라 현재는 김홍도의 화풍을 이어받은 후대의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05.연광정연회도 練光亭宴會圖 (평안감사향연도 平安監司饗宴圖), 조선, 19세기, 가로 196.9cm, 세로 71.2cm, ©국립중앙박물관

가장 성대한 향연이 그림에 한 가득

[부벽루연회도]는 세 번의 잔치 장면 중 가장 성대한 향연을 그렸다.다과상을 나르는 등 연회를 준비하는 모습과 실제로는 차례대로 공연했을 다섯 가지 춤이 한꺼번에 그려진 점 등은 시간 순으로 진행된 여러 장면을 집약하여 한 화면에 담아낸 궁중기록화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잔치를 보기 위해 나무를 타고 올라간 아이들, 술에 취해 부축을 받는 사람, 다툼이 일어난 현장, 연회와 상관없이 술판을 벌인 사람들, 사람이 많이 몰린 곳에서 엿을 파는 아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사령 등 유쾌하고 익살맞은 인물 표현은 조선 후기 김홍도 풍의 풍속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부벽루연회도]의 우측 하단에 보이는 절은 고구려 광개토왕 때 세워진 영명사(永明寺)로 추정된다. 영명사는 조선시대 평안남도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어 재건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는 석탑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이 작품에는 영명사와 승려, 5층 석탑이 있어 이곳이 영명사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평양성 안에서 대동강을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청류벽에 접한 부벽루를 넘어 펼쳐진 대동강의 정경이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동강 한가운데의 섬 능라도(綾羅島)이다.


이 섬은 평양성에서 바라본 모습이 마치 비단을 풀어 놓은 것처럼 모래 언덕이 높이 솟아 있어 ‘능라도’로 불렸다. 화려한 연회가 펼쳐지고 있는 부벽루 너머 저 멀리 능라도에서는 밭을 갈고 논을 매거나 물고기를 잡는 등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옅은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성대한 연회와 목가적인 능라도 풍경의 대비는 경제적으로 번영한 도시였던 평양의 화려함과 평화로운 백성의 일상이 공존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부벽루에서 바라본 평양과 대동강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미완성으로 남은 김황원의 시구처럼 [부벽루연회도]를 통해 화가가 말하고자 했던 속뜻이 더욱 궁금해진다.



글, 사진. 양승미(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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