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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거시대는 무엇으로 꾸몄을까?
작성일
2020-05-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009

과거시대는 무엇으로 꾸몄을까? 미인도와 화장품 용기를 통해 살펴본 화장 변천사.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타고난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겨 과장되고 인위적인 화장보다는 희고 윤택한 피부 표현에 중점을 뒀다.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케이뷰티 (K-beauty)까지 이어진 은은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다. 옛 선인들의 화장품과 화장품 용기를 통해 우리나라 화장 문화의 원류를 추적해 본다. 01.보물 제 1973호 신윤복 필 〈미인도〉.혜원 신윤복(약 1758~1813년 이후)이 그린 조선후기 여인의 전신상(全身像)이다. ©문화재청

우리나라 화장의 기원

얇은 눈썹에 수줍은 눈빛, 붉고 매혹적인 입술, 하얀 피부를 지닌 살아있는 듯한 미인. 조선 미인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은은한 연미색 저고리와 풍성한 옥색 치마를 입고 노리개를 살짝 쥐고 있는 자태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과하진 않지만 맑고 단아한 생김새를 잘 드러내는 여인의 화장법은 그녀의 매력을 한층 배가시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타고난 아름다움을 중요시 여겨 < 미인도 >의 여인처럼 백옥 같은 피부에 얼굴이 윤기 나는 화장법을 선호했다. 삼국시대부터 현재의 케이뷰티(K-beauty)까지 한국의 화장 스타일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이었다. 문화 경제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과 같이 얼굴을 밝히는 조명이 없었으므로 하얀 피부는 그 자체로 신비로워 보였을 것이다. 또한 백옥 같은 피부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고귀한 신분임을 드러내 하얀 피부에 대한 선망은 전 시대를 걸쳐 계속되었다.


치장의 역사, 화장법 변천사(삼국~조선시대)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쫓는다. 미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화장기술과 화장품의 종류를 밝힌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으나 몇몇 문헌을 통해 단정한 용모를 지향한 선조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중국 양나라에 파견된 사신이 그려진 < 양직공도(梁職貢圖) > 속 백제인은 흰 피부에 정돈된 의복을 갖췄다. 쇼토쿠(正德)시대에 출판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1715)에는 일본인이 백제로부터 화장기술과 화장품 제조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을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어, 백제의 화장기술은 그 당시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02.청자상감운학문모자합. 큰 합 속에 작은 합과 기름병이 들어간 청자모자합으로 분, 연지, 기름 등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고 작은 국화문을 가득 상감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국립중앙박물관 03.청화백자 연꽃 넝쿨무늬 합. 화협옹주묘 출토품으로 면약으로 보이는 꿀 찌꺼기가 담겨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 주옥으로 치장했다.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처럼 깨끗한 옷 입기를 좋아했다는 고구려인에게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의 기풍이 느껴진다. 신라에는 유난히 미(美)에 관한 묘사가 많은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뭇 사람들이 놀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고, 그를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라인들이 지혜, 용기와 더불어 미모를 골고루 갖춘 자를 지도자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기술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고 불교의 영향으로 향수와 향료가 다수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화장문화를 전승하고 이를 발전시켰다.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에 들어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귀부인은 향유 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은 바르되 연지를 즐겨 바르지 않았다. 눈썹은 넓게 그렸다”라고 하여 한국 고유의 엷고 우아한 화장이 고려시대에도 거의 변함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도덕관념에 따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신체를 청결하게 가꾸고 단정한 용모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사치풍조를 금지해 과도한 화장이나 치장은 경계의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의 화장법은 크게 기초화장과 색조화장으로 나눠지는데 먼저 깨끗이 세안을 해 피부를 청결하게 만들었다.


기초화장 단계에서는 지금의 로션과 같은 역할을 하는 미안수(美顔水), 크림에 해당하는 면약(面藥), 화장유 등을 발라 피부를 곱고 촉촉하게 정리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희고 옥 같은 피부를 선호해 피부결을 정돈하는 기본단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꿀 찌꺼기인 밀랍(蜜蠟)을 지금의 팩처럼 펴발랐다가 일정 시간 후에 떼어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피부를 매끈하게 정리하면 비로소 얼굴에 분을 바를 수 있었다.


04.청화백자 모란 넝쿨무늬 항아리. 화협옹주묘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모란 넝쿨무늬 호’에는 미안수로 추정되는 지하수가 담겨 있었다. 지금의 로션과 같은 기능인 미안수는 피부를 곱고 촉촉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05.색회 등나무무늬 합. 일본 아리타에서 제작된 자기로 백색분이 담겨 있었다. 성분 분석 결과 쌀가루 등 유기질과 연백, 활석 등이 검출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에는 미분(米粉)과 연분(鉛粉)을 사용했는데, 미분은 글자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쌀과 서속(黍粟) 가루를 배합한 것이다. 다만 곡식을 원료로 해서 비린내가 날 뿐 아니라 접착력도 떨어져 물이나 기름에 개어 사용해야만 했다. 진수아미( 首蛾眉)는 여자의 용모가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로 조선에서는 정갈한 눈썹 모양을 만들기 위해 눈썹 털을 뽑아 다듬고 미묵으로 선을 그렸다.


눈썹을 그리는 안료인 미묵은 관솔 먹, 달개비꽃잎, 목화꽃을 태운 재 등을 기름에 개어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볼과 입술 및 손톱이 붉은 것을 좋은 미인상으로 간주했기에 일찍부터 연지( 脂)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홍화(紅花)에서 추출한 가루를 환약 형태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살구씨, 복숭아씨, 유채꽃을 압착해 만든 기름에 개어 사용했다. 연지를 솔로 그리거나 둥근 연지도장을 찍으면 비로소 화장이 마무리됐다.


옛 선인들의 화장품 용기와 화장품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화장품을 어떤 용기에 담아 썼을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화장품 용기는 대부분 도자기였던 듯하다. 현존하는 유물 중 신라의 화장품 용기로는 향유와 머릿기름을 넣을 수 있는 작은 도자기 유병과 분이나 연지 등을 담아 썼을 것으로 보이는 뚜껑 달린 합 등이 있다. 고려시대 화장품 용기 중에는 향유 및 머릿기름을 담아두었던 청자 기름병이 가장 많다.


우리나라는 줄곧 머리 치장에 주안을 두었기 때문에 머릿기름을 담는 유병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아한 비색(翡色)이 돋보이는 분합과 분접시 등도 많이 전한다. 우수한 청자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무늬에 조형미가 우수한 청자 화장품 용기가 다수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은기, 백자, 목기 등에 화장품을 담았다. 18세기 초중반 왕실 가족 무덤 일부에서는 화장품이 담겨 있는 소형 화장품 용기가 발견됐다. 예부터 부장품은 피장자의 위격과 직결됐다. 왕실에서는 가족들의 무덤에 당대 최고급 공예품인 화려한 화장품 용기들을 부장해 위상을 세우고자 했다. 화장용 자기는 백자 명기와 크기가 비슷해 껴묻거리로 오인되기도 했으나 화장품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부장자가 생전에 사용한 생활기로 보인다.


06.청자 기름병. 머리나 몸에 바르는 기름을 담기 위한 작은 병이다. 고려시대에는 줄곧 머리치장에 주안을 두었기 때문에 머릿기름을 담는 유병이 많이 사용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07.분채 풀꽃무늬 잔. 화협옹주묘에서 출토된 작은 잔에는 적색분과 도장이 담겨 있었다. 청나라 최대 도자기 제작지인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특히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홍씨(元嬪洪氏, 1766~1779) 인명원(仁明園)에서는 당시 최고 권세가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려한 은제 합과 항아리, 수입 청화백자가 출토됐다. 2015년 남양주에서 발견된 사도세자의 동복누이 화협옹주(和柔翁主, 1733~1752) 무덤에는 12건의 화장품 용기가 묻혀 있었다.


미안수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화백자 모란 넝쿨무늬 항아리’를 포함해 5개의 작은 합에는 다양한 면약으로 보이는 꿀 찌꺼기가 담겨 있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화려한 등나무무늬의 자기에는 백분이, 청나라에서 제작된 ‘분채 풀꽃무늬 잔’에는 연지와 연지도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아마도 얼굴을 곱게 꾸미는 ‘단장’이라는 행위의 성격상, 왕실의 화장품을 담는 용기에는 화려하고 정교하기로 이름 높았던 수입 자기가 선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케이뷰티는 화장품 제작 수준뿐만 아니라 화장 기술, 감각적인 화장품 용기까지 하이테크(high-tech) 기술의 집약체다.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을 중요시하는 한국의 화장 문화는 전세계 미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던 옛 선인들의 마음이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케이뷰티의 원류가 된 것은 아닐까.



글. 사진 곽희원(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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