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나주 영산포 귓가 메아리로 남은 영화로웠던 포구
작성일
2024-02-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7

나주 영산포 귓가 메아리로 남은 영화로웠던 포구 드넓게 펼쳐진 평야에 호남의 젖줄이라 했던 영산강이 굽이도는 나주는 예로부터 남도의 물자가 모였다 흩어지는 풍요의 고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영산포는 목포 일대 서해안에서 내륙 가장 깊숙이 다다를 수 있었던 포구로 일찍이 큰 장이 형성됐다. 와글와글 북적이던 날은 이제 옛일이 되었지만 영산포 곳곳에 그때의 흔적과 목소리가 남아 자박자박 포구마을을 걷게 했다. 01.영산교에서 바라 본 황포돛대 나루터와 영산포 등대

등대 불빛 따라 넘실댔던 풍요

영산포는 이미 고려 때 조창(漕倉)이 설치되었을 만큼 수운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조창은 각 고을에서 세금으로 거둔 각종 현물을 도읍지로 운송하기 위해 해안 또는 강변에 설치한 창고를 가리킨다. 비옥한 평야에서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서해 연안 어촌마을 사람들이 낚아 올린 해산물이 영산포로 집결했으니 보통 입지가 아니다. 1897년 목포가 개항될 때 인접한 영산포가 수탈의 거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는 1915년 영산포 선창에 등대를 설치했다. 내륙 하천에 등대가 서 있는 풍경이 우리에게 상당히 생경한 일이 된 것은 이 영산포 등대(사진 01)가 우리나라에 하나 남은 내륙 등대라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영산포 등대는 내륙에서 수탈한 물자를 더욱 원활히 실어 나르기 위한 장치였고, 이는 그만큼 그 시절 수운이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02.나주 영산포 자기수위표

오늘날 영산포 등대는 ‘나주 영산포 자기수위표’(사진 02)라는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근대기를 지나며 점차 육상 교통이 발달한 데다가 1970년대 영산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뱃길이 완전히 끊어짐에 따라 영산포 등대가 물길을 인도하는 기능은 상실했지만 이후로도 한동안 범람이 잦았던 영산강의 수위를 관측하는 용도로 기능한 영향이다. 1989년 영산대교에 수위 측정 시설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그 기능마저 잃었지만 근대기에 건립된 산업 시설물로 가치가 또렷한 영산포 등대는 이곳이 영산포라고 일러주는 이정표로 남아 지역의 변천사를 되짚게 한다.


03.문서고 04.구로즈미 이타로 저택

풍요로웠던 것만큼 빼앗길 것이 많았던 때의 흔적

일제가 영산포에 설치한 것은 등대뿐만이 아니었다. 우편·전신·전화 시설이 들어섰고, 선로도 놓였다. 그렇게 등장한 우체국과 은행, 기차역은 조선인의 생활 편의가 아니라 역시나 물자 수탈을 위한 장치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 직접적인 수탈의 흔적이 영산포에 있으니,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출장소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 이민을 추진하여 일본 내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했고, 이렇게 국내로 유입된 일본인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식민 지배 체제를 견고하게 다졌다. 그와 함께 조선의 땅을 개간하여 농업 발전을 돕는다는 명목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한 기관이다.


일제는 1909년 영산포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 출장소는 1920년 목포로 이전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처음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가 설치될 때만 해도 개항지인 목포보다 나주가 훨씬 영향력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920년 목포지점이 설치되면서 영산포출장소는 폐쇄되었고, 출장소는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어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는 영산나루 내에 1910년경 건립해 문서고(사진 01)로 사용했던 건물이 남아 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서고 건물과 함께 같은 시기에 지어진 부속 관사 건물과 수령 250년이 넘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출장소의 규모와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05.죽전골목 06.정미소 거리 07.구 영산포극장 벽에 그려진 벽화

옛이야기가 된 영화로웠던 날들

영산포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내 일본인이 유입되어 경제적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일본인이 지은 주택과 상점이 영산포 곳곳에 남아 있게 된 이유다. 대표적인 장소가 일제강점기 나주 일대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지은 ‘일본인 지주 가옥’(사진 02)이다.


구로즈미 이타로는 농지뿐만 아니라 조선가마니주식회사, 영산포운수창고주식회사, 조선전기주식회사 등 회사 경영에도 능통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지주이자 자본가였던 그는 1930년대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들여와 일본식 정원까지 갖춘 대저택을 지었다. 주요 건물은 일본의 목조주택 양식에 타일과 붉은벽돌 등을 활용한 서양의 조적조 건축술을 더했는데 이를 일양절충식 건축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 방치되면서 본채와 창고 정도가 남았는데 나주시에서 영산포의 근대적 가치를 살리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2009년 이 집을 매입했고,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은 홍어 가게가 줄을 잇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포구에서 이 일본인 지주 가옥 사이 골목에 상점이 즐비했다. 일본인이 소위 ‘긴자 거리’라고 불렀던 중심 상점가 외에도 1960~70년대 새벽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랬던 죽전골목(사진 03)과 10여 개의 정미소가 밀집해 있던 정미소 거리(사진 04)까지 영산포는 지금보다 훨씬 다채롭고 활기가 넘쳤다. 호시절에는 영화관도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일부 장면을 이 영화관 일대 상점가에서 촬영했다고 하니 영산포는 상당히 오래도록 근대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이어져 2019년부터 홍어 거리에서 옛 영산포극장(사진 05)에 이르는 옛 상점가를 근대문화거리로 조성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그 가운데 위치한 영산포역사갤러리에 들러 영산포의 역사를 빠르게 훑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근대문화유산 푯말을 달고 있지 않아도 영산포는 골목골목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홍어 손질하는 상인이며, 참기름 짜러 나온 노파며, 골목 어귀에서 마주하는 이웃의 증언을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월이 지나도 풍요가 흐르던 포구 인심에는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좋았던 시절은 다 가버렸다지만 기꺼이 기억을 나눠주는 그네들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글. 서진영(《하루에 백 년을 걷다》 저자) 사진. 임승수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