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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관 협력과 남북 문화 교류의 상징, 북관대첩비
작성일
2021-10-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456

민관 협력과 남북 문화 교류의 상징,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는 함경북도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함경도 길주, 단천, 백탑 등지에서 격퇴한 공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숙종 34년(1708) 함경북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비문을 쓰고 마을 주민의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01.경복궁에 있는 북관대첩비 복제품 02.북관대첩비 복원모습_북한 함경도 길주 ©국립문화재연구소

기구한 운명의 북관대첩비

이 비석의 운명은 기구하다. 1905년 러일전쟁으로 함경도 지방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 제2예비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에게 발견되었고, 이케다는 이 비석에 새겨진 일본의 패전 기록을 수치스럽게 여겨 주민들을 협박해 일본으로 강탈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는 조선에 패배한 굴욕을 씻겠다는 명목 아래 태평양전쟁 당시 A급 전범들이 안치되어 있는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왔다. 야스쿠니신사에 보관되어 있던 북관대첩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09년 당시 도쿄에 유학 중이던 조소앙 선생이다.


그는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비석을 발견하고 『대한흥학보』 제5호에 비석이 야스쿠니신사에 소장된 비통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주목받지 못하였고, 이후 오랫동안 이 비석의 존재는 잊혀왔다. 이후 북관대첩비의 일본 야스쿠니신사 보관 사실을 국내에 알린 분은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 선생이었다. 그는 『대한흥학보』에 실린 조소앙의 글을 접하고 야스쿠니신사 경내를 샅샅이 뒤져 비를 찾아냈다. 그가 발견할 당시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신사의 비둘기 사육장 옆에 말 그대로 내팽개쳐져 있었다고 한다.


한일 양국 다양한 형태의 반환운동 전개

최서면 선생은 비석의 국내 귀환을 위해 의병장 정문부의 후손인 해주 정씨 종친회와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반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비의 반환을 위해서 해주 정씨 문중에서는 한·일친선협회를 통해 일본의 야스쿠니신사측에 처음으로 비 반환을 요청하였고, 1979년에는 우리 정부도 공식적으로 비 반환 요청에 나섰으나 조총련의 반발로 성사되지 않았다. 비석의 반환운동은 1990년대 들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었다. 호국정신선양회(김성준 회장, 1991), 북관대첩비환수추진위원회(1993),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집행위원장 이승로, 일본측위원장 가키누마 센신)가 발족(1997)되는 등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반환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한일불교복지협의회의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1997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의 한국 귀환을 위해 신원보증을 서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하였는데, 이분의 환국선물로 북관대첩비를 한국에 반환시키자는 서한을 야스쿠니신사에 보냈다. 이러한 스님의 노력으로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서는 남북 간 조정이 필요하며 신사에 반환을 강제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과 남북 간 협의 후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이 있을 경우, 비를 반환할 수 있다는 야스쿠니신사의 공식서한이 1999년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에 전달되었다. 이듬해인 2000년 4월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한국의 초산(樵山) 스님(한일불교복지협회 회장)과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초산 스님과 독립군의 후손인 김원웅 국회의원 등 한일의원연맹이 반환 추진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2003년 한일불교복지협회가 비 반환이 성사 단계임을 정부에 통보해 왔다.


정부 당국자의 노력과 남북 합의

민간 차원의 반환운동이 성과를 내면서 정부도 적극적으로 반환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2005년 5월 우리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한 남북 문화재당국 간 회담을 북한에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6월 20일에는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관대첩비 반환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5년 6월 23일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관대첩비 반환 사업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한 후, 우리 정부는 6월 28일 일본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하였다.


이에 야스쿠니신사의 이사회는 2005년 10월 3일 북관대첩비 반환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고, 10월 12일에는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 간에 북관대첩비 인도문서 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2005년 10월 20일 북관대첩비가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10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 개관식 때 각계 인사와 일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후 북관대첩비 인도 방안 논의를 위해 남북한 양측 대표들이 2005년 11월 개성에서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북한 측으로부터 비석의 원래 받침돌이 남아 있으며 원소재지에 비를 세우기 위해 진입 도로를 건설 중이라는 내용을 전달받기도 하였다. 2006년 2월 13일 ‘북관대첩비 북한 환송에 관한 협의’를 거쳐 3월 1일 개성에서 북한에 인도하였다.


북관대첩비 환수의 의의

북관대첩비가 발견되고 난 후 수십 년간 이루어진 반환운동은 반환 추진에 참여한 역사학자와 후손, 각종 민간단체의 쉼 없는 노력과 일본 내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협력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정부가 나서서 북한 당국자 및 일본 정부와 적극적인 협상을 이어 나감으로써 북관대첩비 반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과 북한이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남한이 북한을 대신하는 과정에서 남북한 당사자 간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역사 복원에 남북이 뜻을 같이하였다는 것은 이후 남북문화교류를 위한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관대첩비가 반환된 2005년은 광복 60주년,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여 그 의미가 깊은 해였다. 북관대첩비 환수는 단순히 문화재를 되찾는 데 그치지 않고 빼앗긴 민족혼을 환수·복원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근현대사를 통틀어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글. 박대남(前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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