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기고
- 제목
- 문화재의 뒤안길(115)- 사자관 (서울경제, '21.11.29)
- 작성자
- 이상백
- 게재일
- 2021-11-29
- 주관부서
- 대변인실
- 조회수
- 3895
문화재의 뒤안길(115) (서울경제, '21.11.29)
글씨 쓰는 사람, 사자관
글/국립고궁박물관 이상백 학예연구사
사자관은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한 관청인 승문원(承文院)의 사자관청(寫字官廳)에 소속되어 외교 문서와 왕실 기록물 작성을 담당한 관원이다. 사자관을 공부하다 보니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만났다. 『중종실록』의 기록인데 전문직인 사자관의 자긍심을 볼 수 있는 재미난 일화다.
1539년(중종 34) 승문원의 도제조(都提調)는 사자관 김노(金魯)가 글씨를 삐뚤게 쓰고 크기도 같지 않아서 조심해서 글씨를 쓰라고 나무랐다.
그러자 김노는 ‘내가 글씨를 바르게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늙은 제조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 것이다.
만일 외교문서를 쓰는 종이를 제조(提調)에게 주고 쓰라고 하면 잘 쓰겠는가?’ 라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무려 정1품에 해당하는 도제조를 쏘아붙인 사자관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사자관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있다. 직책이 조선 초에는 없었고 문신 중에서 글씨를 잘 쓰는 자로 하였으나, 후에 글씨를 잘 쓰는 자가 매우 적어 선조 조부터 사士·서인庶人을 막론하고 사자관으로 삼았는데, 이해룡李海龍, 한호韓濩가 그 시작이라고 했다.
우리가 한석봉으로 널리 알고 있는 한호도 사자관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막상 사자관을 깊이 살펴보고자 하니 사료가 적어 접근이 힘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사자관에 대해서 알려진 바도 많지 않아 놀라웠다. 이런 상황에서 2021년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자관청등록(寫字官廳謄錄)』 입수는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기록물은 조선 말기인 1877년(고종 14)에서 1881년(고종 19)까지 6년간 짧게 작성된 관청일지이지만 그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사자관의 직제, 조직 문화, 글쓰기 활동 등 다양한 모습을 날짜별로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 기록물은 향후 사자관 연구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국가의 주요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사람들. 글씨를 쓰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들.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새로운 기록물의 등장에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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