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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존경과 신뢰의 증표, 필암서원 묵죽도
작성자
조상순 연구관
게재일
2016-08-25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조회수
1291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는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에는 아주 독특한 건물이 있다. 대게 서원이나 향교는 유학(儒學) 교육기관인지라 건축 장식은 매우 절제되고 배치가 엄정하다. 그러나 사당 앞 삼문 서편에 놓인 경장각(敬藏閣)은 연꽃과 봉황, 용머리 등으로 장식된 공포 구조에, 울긋불긋 화려한 모로단청으로 치장되어 있다.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왕위에 오른 지 아홉 달 만에 병으로 사망한 조선의 12대 임금 인종(仁宗, 1515~1545)과 조선 중기 대학자였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사연이 담긴 묵죽도의 판각(板刻)이 보관되어 있다.


  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박사가 된 김인후는 서른 셋의 나이에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세자(世子)의 시강(侍講)을 맡는다. 후에 인종이 된 세자는 어느 날 직접 붓을 들어 묵죽도를 그려 스승에게 주었고, 스승인 김인후는 신하로서 절의를 지키겠다는 뜻이 담긴 시(詩)를 쓴다.


  ‘뿌리 가지 마디 잎 모두가 정밀하고 은미하며(根枝節葉盡精微), 돌을 벗삼은 굳은 정신 화폭 안에 들어있네(石友精神在範圍). 비로소 성인의 정신이 조화롭다는 것을 알았으니(始覺聖神侔造化), 세상과 한 덩어리 되어 서로 어김없으리라(一團天地不能違)’


  제자와 스승, 세자와 신하의 지위를 떠나, 대나무와 바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서로 믿고 존경한다는 마음을 주고받은 것이다. 당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와 검소한 생활을 즐기며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임금의 관계는, 인종이 병에 걸려 숨지면서 끝난다. 김인후는 믿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후대 임금에게도 전해지는데, 화성을 영건한 정조(正祖)는 선대 임금과 신하의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경장각’이라는 이름을 내려 이 묵죽도를 보관토록 한다. 그리고 김인후는 10년 뒤 문묘에 배향된다.


  사적으로 지정된 이 필암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이곳에는 정조의 어필(御筆)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봉구(尹鳳九) 등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쓴 현판이 남아 있다. 건축은 직접 자로 재어 척도로 분석했지만, 선비의 학문과 정신은 남겨진 글과 그림을 통해서 이해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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