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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필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작성일
2014-03-1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6675

화장필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니가 없는 나는 생각하기 싫어’. 하상욱 시인의 단편시집 ‘비비크림’의 한 구절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화장 없는 일상이란 이처럼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자연스럽기 위해 화장을 하는, 때문에 화장없인 살 수 없다 말하는 대한민국 화장 현주소를 들여다본다.

양녀(洋女)의 곧은 자태를 혼을 잃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두 눈이 혼돈스러웠다. 양녀는 물론이요 지나(중국) 여인까지 머리를 파마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의복의 찬란함과 체격의 훌륭함이며 지나 여인의 곡선미를 그대로 나타내는 의복미가 모두 시골뜨기 나에게는 구경거리였다. 인력거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하였다. 길가 쇼윈도에 비치는 내 모양이 나 스스로 부끄러운 듯하여 화장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위의 글은 1920~30년대 한국의 여성 작가였던 백신애(1908~1939)가 중국의 청도를 여행하면서 쓴 「청도 기행」의 한 대목이다. 백신애는 일제 강점기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 출신으로, 조선여성동우회(1925), 경성여성청년동맹(1925) 등에서 활동하고, 여성계몽 운동과 저항문학으로 현실참여에 앞장섰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번화가인 산동로(山東路)를 거닐다가 서양 여성들과 중국 여성들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열등감을 느꼈음을 토로하였다. 그런데 그때의 열등감이 “화장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는 말로 표현된 것이 눈에 띈다.

또한 1920~30년대에는 ‘양처(良妻)’가 되려면 결혼 후에도 항상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는 의식이 중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내면화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잡지에서는 결혼 전에는 돈과 시간을 허비하여 화장을 하다가 결혼하면 게을리 하는 사람을 본받지 말고 집에 있을 때에도 화장을 다소 하고 있으면서 부부 화합의 비결을 만들라고 충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여성이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화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고 일제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여성조차도 ‘화장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이미 1920~30년대에도 한국은 ‘화장 권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근 백 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장은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외모 가꾸기의 한 요소가 되었다. 요즘에는 여성들이 직장을 다니거나 이성을 만날 때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고생들도 외출할 때 비비(Blemish Balm)크림 정도는 바르는 걸 예사로 여긴다. 남성들을 위한 화장품 산업의 규모도 나날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2012년 현재 한국 화장품 시장 규모는 63억 400만 달러(한화 약 7조 540억 원)로 세계 11위에 해당한다고 하니 한국의 인구 수에 비교해 볼 때 엄청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화장품 산업은 한국에서 불황을 모르는 업종이라고 한다.

01. 한 남성 전문 스킨케어 브랜드에서 개최한 남성모델 선발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한 한 남성이 제품을 사용 중이다. 지난해 남성화장품 시장은 1조 300억 원으로 급성장하였다. ⓒ연합콘텐츠
02. 일본 10대 소녀들이 인디언 화장을 한 채 도쿄 신주쿠의 환락거리인 가부키쵸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연합콘텐츠

 

갸루상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하지만 화장은 여성들에게 일종의 딜레마와도 같은 문제이다.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은 ‘천박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쉽기 때문이다.

2012~2013년, “사람이 아니므니다!”라는 화제의 유행어를 낳은 한 개그맨의 극중 이름은 ‘갸루상’이었다. ‘갸루(ギャル)’는 ‘girl’의 일본식 발음에서 비롯된 말인데, 일본에서 ‘갸루’, 혹은 ‘고갸루’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들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그들만의 독특한 화장법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외모에서 모티브를 얻은 갸루상 캐릭터는 하얀 분칠과 짙은 눈 화장, 붉은 립스틱, 금발 머리, 세일러복 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하곤 했다. 갸루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엉뚱한 발언을 함으로써 그녀(?)의 독특한 화장법과 맞물려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처럼 ‘지나친’ 화장은 천박하다고 간주되거나 비웃음이나 풍자의 소재가 되곤 하는 것이다.

화장을 안 해도, 반대로 지나치게 해도 문제가 되는 세상, 어떻게 보면 여성들에겐 실로 살기 힘든 세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화장은 전략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주어진 ‘화장을 해야 하는 운명’이 정말 ‘부담’, ‘굴레’이기만 할까.

오늘날의 외모 지상주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고, 미모는 ‘인생역전’의 중요한 자산이다. 직업뿐 아니라 남녀가 따로 없고, 노소도 따로 없다. 그러다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외모를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피부, 체형관리, 다이어트, 성형수술, 화장, 패션 등 미용관련 산업은 나날이 확대되어 간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따고, 토익 점수를 올리고, 이런 저런 자격증을 따듯 외모 가꾸기도 하나의 ‘스펙’처럼 관리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예쁜 여자 되기’에 대한 강박은 남성들에 비해 더욱 심하다. 그러나 이것을 무조건 사회나 남성들의 강요에 의한 ‘수동적’인 행위로만 볼 수는 없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학력이나 경력을 높여 지식인, 전문직 여성으로서 성공하는 것 못지않게 주효한 성공 전략이다. 따라서 여성이 스스로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몸의 교환가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다이어트나 성형수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장을 통해 자신의 얼굴과 피부를 가꾸는 여성들은 아름다워야만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화려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많은 경우 여성들의 화장은 스스로의 선택인 것이다.

여성들에게 있어 화장을 하거나 안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아름다워 보이고 싶다면, 화장을 한 자신의 모습에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면, 세상이 화장을 한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하다고 생각된다면 얼마든지 화장하라

 

‘누드’+‘메이크업’?

언젠가부터 ‘누드화장’, ‘물광 메이크업’, ‘민낯 얼짱’, ‘꿀 피부’ 등의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화장을 안 한 듯 자연스러운 피부표현이 중요한 미의 기준이 된 것이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 촉촉하고, 이목구비는 뚜렷한, 그러면서도 립스틱이나 파운데이션, 아이라이너 등으로 일명 ‘떡칠’을 하지 않은 얼굴이어야 아름답다고 인정받는다. 아마도 ‘누드’와 ‘메이크업’이라는 형용모순의 합성 조어가 바로 ‘예의’ 있으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화장의 이상적 절충안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민낯 얼짱’ 담론을 양산하고 이를 이용하는 것 역시 미용 산업이라는 사실이다. 신문, 잡지, TV, 화장품, 피부과 병원 등이 ‘민낯’처럼 보일 수 있다며 여성들에게 새로운 꾸미기의 방법을 권하는 것일 뿐이다.

점차 ‘자연스러운’, ‘화장 안 한’ 얼굴에 가까운 메이크업이 유행하는 것은 화장이 귀찮은 여성들로선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민낯’은 진짜 화장품 하나 바르지 않은 얼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민낯’처럼 보이면서도 피부와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보이는 화장품을 (어쩌면 오히려 더 많이) ‘바른’ 얼굴을 말하는 것이다. 화장품 시장은 고객들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있어 화장을 하거나 안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아름다워 보이고 싶다면, 화장을 한 자신의 모습에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면, 세상이 화장을 한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하다고 생각된다면 얼마든지 화장하라.

성형이나 다이어트에 비하면 화장은 훨씬 손쉽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외모 가꾸는 과정에 혹시 자본이나 권력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지 못 한 채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외모를 가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은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는 정도는 필요하겠다. 그것이 우리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아름다워지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03.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2013 오송 화장품ㆍ뷰티 세계박람회’에서 관람관에 설치된 조형물들에 대해 방문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콘텐츠

글 이영아(명지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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