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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문화재의 뒤안길(103)-조행일록 (서울경제, '21.8.9)
작성자
정창운
게재일
2021-08-09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1446

문화재의 뒤안길(103)-조행일록 (서울경제, '21.8.9)



조선시대 조운(漕運) 기록 『조행일록(漕行日錄)』


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홍보과 학예연구관 정창운




조행일록1(국립해양박물관).jpg

조행일록/ 국립해양박물관 제공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세금을 거두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한 일이다.

과거에는 세금을 곡식으로 거두었기에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곡식(稅穀)을 수도로 운반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산과 강이 많이 대규모 화물 운송은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세곡도 물길을 이용해 운반하였는데 이것을 ‘조운(漕運)’이라고 한다.

조운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행정적 체계를 갖추었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운은 국가 재정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일이었기에 행정 절차 등을 상세히 규정해 놓아 제도의 얼개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실제 운영 상황과 속사정을 알 수는 없다.

다행히 조운을 담당했던 관리가 조운의 시작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조운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전라도 함열(현 전북 익산) 현감이었던 임교진이 쓴 『조행일록(漕行日錄)』이 그것이다.

임교진은 1862년 6월 부임하자마자 세금을 걷는 일을 걱정하고 있으며, 같은 해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조운 준비에 착수한다. 주위 8개 고을에서 거둔 쌀과 콩 13,000석을 12척의 배에 싣고, 1863년 3월 15일 익산에서 출항하여 서해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 5월 2일에 한양에 도착한다. 운항 중 풍랑을 만나 조운선이 좌초되기도 하고, 한강에서는 모래턱에 배가 걸려서 고생을 하는 등 규정보다 보름 이상을 늦게 된다.

한양에 도착 한 후에도 처리가 지연되어 십수일이 지체되기도 하지만, 무사히 세곡을 납부한 후 6월 2일 함열로 돌아오는 것으로 일기는 끝이 난다.

일기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조운 과정의 다양한 모습들이 실려 있다.

 배의 운항에 관해서는 출항 할 때에나 물길이 거친 곳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돼지를 바치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 침몰선에서 돼지머리뼈가 출수되고 있어 흥미롭다.

또한 당시 조운선이 난파된 곳이나 물길이 거칠고 위험한 곳으로 지목 된 곳이 오늘날 대표적인 수중문화재 발굴지여서 주목된다.

조운 행정 제도와 관련해서는 연해의 지방 군현에서 교대로 물길을 안내하여 조운선 운항의 안전을 담보하였고 다양한 공문을 주고받으며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난파된 선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법령과 현실의 괴리, 이에 따른 해당 지방관과의 갈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기도 하다. 한양에서 세곡을 납부할 때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던 사실도 재미있다.

조행일록은 조선시대 조운의 준비부터 납부까지 모든 과정과, 바닷길과 선박 운용 방법을 상세하게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조행일록2(국립해양박물관).jpg

    

조행일록/ 국립해양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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