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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조선 문인 상상의 정원 ‘의원’
작성자
이원호 연구사
게재일
2017-03-09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조회수
2020

 


  조선시대 문인들은 문학(文), 역사(史), 철학(哲)을 기본소양으로 삼았으며 한 가지 취미에 집착하는 ‘벽(癖)’을 지닌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이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사회적 권위와 함께 취미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글재주가 뛰어나도 출세하지 못하면 대부분 궁핍함을 면치 못했다. 당시 벼슬에 나가지 못한 문인들의 취미는 어떠했을까? 소외된 그들에게도 재물과 신분에 거스를 것 없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취미가 있었다. 바로 실제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정원인 ‘의원’을 경영하는 일이다.


  18~19세기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원예와 정원경영이 성행했었다. 원예취미와 정원을 가꾸는 일은 당시 문인들에게는 일반화된 취미였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중요시한 당시 유교적 성향 덕분에 정원은 가장 적절한 자아표현 수단으로 통했다. 더구나 비용과 출세 유무와도 상관없이 마음껏 정원을 조성할 수 있는 ‘의원기’ 저술의 유행은 널리 퍼지게 된다.


  ‘의원’에 대한 기록은 허균(許筠, 1578-1607)이 1607년 화가 이정(李楨, 1578-1607)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꿈꾸었던 정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허균은 이정에게 자신이 평소 꿈꾸던 상상 속의 공간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허균의 정원은 풍수지리적 사상에 따라 터를 잡고 정원을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 원예나 정원감상, 독서, 동물을 키우는 곳으로 활용했다.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의 ‘의원’도 외부공간과 정원 내 건조물의 다양한 활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구곡유거기(九曲幽居記)를 통해 도성 안에 외지고 조용한 곳을 정원으로 선택함으로써 ‘성시 속의 산림’을 누리면서 처사(處士)의 공간을 경영하고자 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나는 ‘의원’은 아름다운 산수(山水)로서 복지(福地), 국세(局勢)가 맺힌 곳을 표현하고 있다. 외원은 뜰을 중심으로 우측의 연못과 산골짜기 물을 이용한 남새밭을 두고, 좌측은 기존의 지형에 초가와 대나무 난간만을 간소하게 둔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린 곳이다. 이는 중국 명말 황주성(黃周星)의 『장취원기』에서 나타나는 공간구성과 유사하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숙수념(熟遂念)』에 나타나는 ‘의원’인 ‘오로원(吾老園)’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외원과 저택의 내부에 해당하는 내원으로 나뉜다. 홍길주의 저택은 현 서울의 감사원 일대로 추정되는데 숙수념의 공간구조를 대입해보면 당시 배산이 되는 북산은 북악산에 해당하고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남강은 지금의 한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도성 정도의 규모를 자신의 정원에 대입한 상당히 대범한 상상으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의원기’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이상향에 대한 관념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정원이라는 공간 속에 탄생한 것이며 그 상상의 공간속을 거닐고 은둔하는 등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현실 속에서 이상향을 찾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 조선시대 ‘의원’은 단순히 상상속의 정원이 아니며 단지 실현되지 않았을 뿐 당시의 정원문화를 반영한 조선시대 정원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설명사진


<3D 지형도에 표현한 숙수념의 공간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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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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