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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자전거로 떠나는 문화재 여행_서귀포시]
등록일
2011-10-24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296

 

 

 

 

21.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올레길을 따라 - 서귀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뿐 아니라 누구라도 인정하듯 섬 구석구석이 빼어난 관광명소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섬 제주는 고려를 침입한 몽고에 대항해 싸운 삼별초의 항몽유적지가 남아있고, 조선시대 수많은 학자와 당쟁 희생자의 유배지였고, 일제시대 가미카제 특공대의 훈련지이자 전적지이기도 했다. 3,400여 희생자를 추모하는 4.3평화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어 우리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알려주고 있다. 최근 열풍이 불고 있는 올레는 제주어로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한다.

 

 

 

 

21-1 노선 살펴보기

 

 

노선 대부분 구간이 농어촌도로, 해안도로와 제주를 일주하는 일주도로(지방도 1132호선)이다. 특히, 일주도로에 정비된 자전거도로는  다른 지자체의 자전거도로 정비모델이 될 만큼 자전거이용자의 안전성, 편의성, 쾌적성 등을 갖추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대정성 내 추사유배지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의 수탈 현장, 정부수립 초기 혼란스러웠던 시기의 암울한 역사 현장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용도로가 다양한 만큼 주변의 아기자기한 전경과 돌담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나 변속장치(기어)를 사용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가능하다. 또한 노선의 끝 구간에 있는 탄산온천에서의 온천욕은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 줄 것이다.

 

 

 

21-2 사진으로 보는 문화유적지

 

 


◎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산방(山房)은 산 속의 굴을 뜻하며, 실제 산의 남측면 해발 150m 쯤에 산방굴이라고 하는 동굴이 있다. 산방산은 산이 높고 해안에 접해 있어 각 사면에서는 각각 다른 기후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식생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다. 이처럼 식물학적으로 중요한 보호지역이기도 한 산방산은 용머리 퇴적층과 이어져 있다. 용머리는 용이 머리를 쳐들고 바다로 뛰어 들려는 자세를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 천만 년 동안 쌓인 사암층의 하나인 용머리 해안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여기에서는 하멜표류기념비를 볼 수 있다.

 

백롬담과 산방산 :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에 사슴사냥을 갔는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드디어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급히 활을 치켜들다 잘못하여 활끝으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들여 화가 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서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것이 날아와 박힌 것이 산방산이고 그 패인 자리가 백록담이다. 실제 산방산은 백록담에 쏙 들어앉을 크기와 형세이다.

 

 

◎ 추사유배지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 김한신의 증손으로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 초기에는 포도청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 적거지인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화재로 소실된 후 빈터로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 사적 제487호로 지정되었다. 김정희는 밖거리(바깥채)에서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모거리(별채)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했고 국보 제180호인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비롯한 여러 점의 서화를 남겼다.

 

 

 

◎ 대정향교
 

조선 태종 16년(1416)에 처음 세워졌다가 몇 차례 옮겨 지은 후 효종 4년(1653)에 현재 위치가 되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북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남쪽에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룬다. 1984년부터는 문명학원을 병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의문당疑問堂’ 액자가 걸려 있으며, <대정향교절목> 등의 유교 관련서적이 남아 있다.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는데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 송악산

 

정상에 2중 분화구가 있는 기생화산체로 99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모여 있다하여 99봉이라고도 한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삼림이 적고, 토양이 건조하여 생태계가 단순하다.
해안가 절벽 아래로도 해안참호 15개소가 있다. 인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내륙 침략의 발판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던 비행장, 포진지, 격납고 잔해 등이 남아 있다.

 

 

◎ 백조일손지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 지역에서도 예비검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에 예비검속 되었던 사람들은 송악산 셋알오름의 일본군 탄약고터로 끌려가 집단 사살되었다. 백조일손 희생자란 이때 희생된 210여 명 중 1957년 발굴되어 이 지역에 안장된 132명을 말한다. 시신을 수습하기도 어려워 유족들은 7년 만에 시신을 찾아 한 곳에 안장했는데 누가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어 ‘1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묘역’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라는 비석을 세웠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비석이 파괴되었고 현재의 위령비는 1993년 다시 세운 것이다. 부서진 비 조각은 현 위령비 옆에 전시해놓고 있다.

 

◎ 비행기 격납고-알뜨르 비행장

 

1930년대 일본이 서귀포시 송악산 아래 들판에 건설한 공군 비행장으로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비행 훈련장으로 조성됐던 이곳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 출격기지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태평양전쟁 시에는 방어기지가 되기도 했다. 일명 자살특공대로 불리는 가미카제(神風) 비행기에 탑승했던 조종사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는 봉분처럼 보이나 콘크리트로 지어진 당시 격납고 20여 개가 남아 있다. 농토로 사용되고 있으나 아직도 활주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알뜨르는 아래를 뜻하는 '알'과 들을 뜻하는 '뜨르'가 합쳐진 제주말이다. 일반적으로 산간마을은 위에 있다는 뜻의 '웃뜨르'라하고 해안마을을 '알뜨르'라고 하였다.

 

 

 

 

◎ 셋알오름 일본군 전적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미국의 일본 본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방어지로 삼고 제주도민을 대규모로 강제동원해 만들었다.
동굴진지(등록문화재 제310호)와 고사포진지(등록문화재 제316호), 지하벙커(등록문화재 제312호)가 있다. 동굴진지는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 모양의 진지로 길이가 1,220m나 된다. 이는 제주에서 가장 긴 동굴이다. 당시 완공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고사포진지는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총 5기 중 2기만 완공되었다. 알뜨르비행장의 보호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지하벙커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적 건물인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었다.

 

 

 

21-3 지도로 보는 서귀포시


 

 

* 이미지 사이즈가 커서 지면에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도로 보는 서귀포시 이미지 파일은 아래부분에 파일로 첨부합니다 *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자전거로 떠나는 문화재 여행]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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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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