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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궁궐의 현판과 주련-덕수궁_중화전 권역 2]
등록일
2011-02-14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507

 

 

 

 

 

2-h-5 즉조당卽阼堂

 

위치와 연혁 : 석어당 뒤편에 있다. 운각(雲閣: 다락집 복도)을 통해 두 건물이 대칭을 이루며 나란히 이어져 있는데, 오른쪽 건물이 즉조당이다. 석어당과 함께 임진왜란 후 선조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이 곳에서 즉위했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이 곳에서 즉위했는데, 그 뒤부터 즉조당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정전(正殿)으로 사용했으며,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태극전(太極殿)·중화전(中和殿)으로 불렀고,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이 지어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렀다. 양위 후 고종이 계속 경운궁에 머물면서 궁명(宮名)을 상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덕수궁’으로 바꾸는데, 이후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의 침전으로 사용했다.
선조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지며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을 만큼 유서 깊은 건물이었으나 원래 것은 1904년 경운궁 화재로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같은 해에 중건한 것이다.

 


뜻풀이 : ‘즉조(卽阼)’는 ‘즉위(卽位)’와 같은 말로,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즉(卽)’은 ‘나아가다’, ‘조(阼)’는 ‘보위(寶位)’ 혹은‘임금의 자리’라는 뜻이다. 덕수궁의 여러 안내문과 최근 발행한 많은 관련서적에서 '阼(조)'를 '祚(조)'로 쓰고 있는데, 통용되는 뜻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 용례가 아니며, 옛 기록에는 한결같이 '阼(조)'로 나와 있으므로 바꾸어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작 정보 : 편액의 글씨는 고종 황제의 어필이다. 석어당의 고종 어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상단에 전서로 '어필(御筆)',왼쪽에 '광무 9년 을사 7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이라고 적혀 있어 1905년 고종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2-j-5 즉조당卽阼堂의 주련

 

위치와 연혁 :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뜻풀이 :
(1) 九天창闔開宮殿(구천창합개궁전)
구천의 큰 문이 이 궁전에서 열리니
(2) 萬國衣冠拜冕旒(만국의관배면류)
만국의 사신들이 면류관에 절하네.


대한제국이 창대해지기를 기원한 시다. 대한제국 선포 당시 경운궁 정전인 즉조당에서 하늘의 창합문(창闔門)이 열리고, 만국의 사신들이 황제께 조회하는 광경을 표현했다. 창합문은 전설에 나오는 문으로 궁궐 정문을 상징한다. 이 시는 당나라 왕유(王維) 1)의 칠언율시 「화가사인조조대명궁지작(和賈舍人早朝大明宮之作:사인가지가 「조조대명관」을 지은 것에 화답하여)」가운데 함련 두 구절을 따온 것이다. 왕유의 시는 중서성의 사인(舍人)으로 재직할 때 가지(賈至, 718~772년)가 아침 일찍 대명궁(大明宮)에 조회 드리는 광경을 읊은 것이다.

 

 

(3) 文德武功▨▨▨(문덕무공▨▨▨)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은... (원문 3자 빠짐),
(4) 龜圖龍曆天休大(귀도용력천휴대)
귀도(龜圖)와 용력(龍曆)을 받으니 하늘의 복이 크도다


하늘의 명을 받은 대한제국 황제의 권력이 신성함을 표현한 구절이다. ‘귀도용력(龜圖龍曆)’은 귀력용도(龜曆龍圖)와 같은 말이다. 귀력(龜曆)은 월상국(越裳國)에서 요 임금에게 바친 천 년 된 거북이의 등에 있던 글이고, 용도(龍圖)는 황하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있던 문양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신성한 왕권을 상징한다.


(5) 月入花庭光靜氣爽(월입화정 광정기상)
달이 꽃 뜨락을 비추니 빛이 고요하고 기운이 상쾌하도다.


청정한 한밤의 정취를 표현한 구절이다. 꽃이 핀 정원에 달빛이 비치는 것을 '입(入)'자를 써서 생동감 있게 표한했다.


제작 정보 : 검은 돌에 글씨를 새기고 금사(金砂)로 글씨 속을 칠했다. 본래 두 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다.

 

 

 

2-h-7 준명당浚明堂

 

위치와 연혁 : 석조전의 오른쪽에 있으며 즉조당과 이어져 있는 건물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즉조당과 같은 크기와 구조로 대칭을 이룬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1914년에는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 옹주를 위해 잠시 유치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궁궐 안에 많은 건물을 중건했던 1897년에 지어졌으나, 당시 건물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그 후 즉조당과 함께 새로 지은 것이다.

 


뜻풀이 : ‘준명(浚明)’은 ‘다스려 밝힌다’, 또는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는 뜻이다. ‘준(浚)’은 ‘다스린다’는 의미로 쓰였다.『서경(書經)』「고요모(皐陶謨)」 편을 보면,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밝혀, 밤낮으로 소유한 집을 다스려 밝힌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가(家)'은 대부가 다스리는 통치 영역을 이르는 말이다.

 


제작 정보 : 현판에 쓰인 ‘명’은 ‘明’과 같은 글자로, ‘日(날일)’ 대신 ‘目(눈목)’을 넣었다.

 

 

 

2-j-7 준명당浚明堂의 주련

 

위치와 연혁 :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뜻풀이 :
(1) 三百六旬春不老 (삼백육순춘불로)
삼백육십일 늘 봄처럼 젊음을 유지하고,
(2) 萬八千年慶長留(만팔천년경장류)
일만 팔천 년 동안 경사가 길이 머무리.


임금이 준명당에서 늘 봄처럼 온화하고 늙지 않으며, 대한제국의 국운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시다.

 


제작 정보 : 준명당 주련 역시 나무 판에 글씨를 새긴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쓴 종이를 기둥에 그대로 발라 놓은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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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유의 자는 마힐(摩詰). 당 격변기에 관직을 맡았다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고 자연에 은거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는데, 그림은 현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동기창에 의해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시집『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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