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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유배지로 떠나는 여행 2]
등록일
2012-04-09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713

 

 

 

 

: 남해충렬사 :

 

 

바다를 건너 남해로 들어오면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이 서려있는 남해 충렬사를 만난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노량해전으로 일본 수군의 전선 400여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지만 이순신 장군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관음포에 있는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에는 이순신 영상관이 건립되어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있다.

 

남해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고 36년 후인 1628년에 이 고장 향사(鄕士) 김여빈과 고승후가 사재(私財)로 초옥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제를 모시게 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이후 1633년에 현종 어필로 충렬사(忠烈祠) 현액이 하사된 것을 비롯하여 조정과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재건과 보수, 관리가 원활하게 수행되었다. 1726년에는 노량서원이 개원되었고, 1746년에는 사당 곁에 호충암을 짓고 화방사에서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을 파견하여 수직호사(守直護祠)토록 하였다.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처음으로 안치된 가묘가 그대로 남아있다.

 

"비로소 남해 땅을 디디게 되었다. 물가 언덕에 대나무 숲이 많이 있고 그 죽립(竹林)속에 누각 같은 집이 있는지라 촌인(村人)더러 물으니, 이충무공의 서원(書院)이라 하였다. 내가 이전에 「우암집」을 보다가 이 비문을 보고 충무공 사적을 일컬어 매양 말하기를 '충무공이 임진 이전에는 벼슬이 극히 낮아 사람들이 이런 기절(氣節)과 장략(將略)이 있는 줄 몰랐더니, 임진년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옛사람이 이른바 평시에 벼슬로 나라에 쓰이지 못한 사람들이 어려운 때를 당하면 충절을 많이 세운다고 한 말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남해는 이순신의 고장이라 할 정도로 조상대대로 충무공 정신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련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충무공 정신을 선양하는 충렬사의 성역사업은 대대로 이어져 번창하였고 후대에 와서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 용문사 :

 

 

용문사는 신라고찰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보물 제1446호인 남해용문사괘불탱(南海龍門寺掛佛幀)을 비롯하여 8점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및 22점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불자와 승려들의 일과 수행을 체험하는 템플스테이가 연중 실시되고 있다.

 

유의양은『남해문견록』에 "나는 보통때에는 절 구경을 무미히 여겨 왔었으나, 용문사 도국(都局)이 매우 좋아 보이기에 '잠깐 절 구경을 하려노라'하고 그리고 가서 산세와 골짜기의 경치 좋은 곳을 살펴보니, 사면으로 바위 벼랑이 높고 험하여 완연한 성첩(城堞)이 이루어져 한 곳도 허(虛)한 데가 없고 '그 속에 큰 샘까지 있어서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아니합니다' 하고, 골짜기 어구에 십여간 너비나 터져 있으니 짐짓 산성을 만들음직한 땅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남해 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으로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소금강산이라 불릴 정도의 기암괴석과 자연경관이 뛰어나며『남해문견록』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곳이다. 유의양은 제1경인 봉수대와 제2경 문장암(文章岩)을 포함하여 총38경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해지며, 중국 진시황이 무병장수하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러 시종 서불을 보냈으나 구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다.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정의연 (남해역사연구회 회장, 저서『남해도 유배인물 100인전』)

 

Q 후송 유의양과 남해문견록에 대해?

 

A 유의양은 조선 영조 때 인물로 높은 관직에 있었거나 중한 죄를 지은 인물은 아니었고 사판(仕版, 관리들의 명부)간행과 관련한 일로 남해로 유배를 오게 된다. 6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기간동안 섬 곳곳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을 다양한 문화유산과 함께 기록했다. 남해의 풍속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삶과 사투리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Q 남해의 유배문학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A 남해 유배객들 중에 문인으로서 글을 남긴 사람이 비교적 많다. 조선시대 4대 서예가로 기묘사화에 얽혀 귀양 온 자암 김구(自庵?I絿)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과 60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는 죄인으로서 남해 기우제의 축문을 쓰기도 했다. 또 숙종 때 유배를 온 김장생의 증손인 서포 김만중이『사씨남정기』『서포만필』등을 이곳에서 집필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유배문학들이 남아있다.

 

Q 유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A 남해도, 거제도, 제주도는 비교적 거물급 인사들이 유배를 오는 곳이었다. 정치적 반대 입장에 있었던 이유로 귀양 오는 경우가 많았다. 섬지방이지만 사대부의 문화가 남아있는 것은 유배객들과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배의 형태는 다양했다. 하인을 데리고 오기도 했으며 섬만 벗어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 정권의 교체에 따라 언제든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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