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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백제 무왕의 길을 찾아서 2]
등록일
2012-01-09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894

 

 

 

: 미륵사 :  639년(무왕 40년) 건립

 

 

 "무왕이 부인과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 나타나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은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자고 청했고 왕이 허락했다.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통력으로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으며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유사』가 전하는 미륵사의 창건설화다.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미륵사 창건은 진평왕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의 상징적인 건축이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기록이 출토된 것이다. '좌평'은 오늘날 총리에 해당하는 백제 고위 관직이었고 '사택'은 백제의 가장 유력했던 일급귀족의 성씨였다. 역사가들은 선화공주와의 결혼이 신라와의 화해책이었다면 사택씨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미륵사의 가람 배치는 탑과 금당(金堂)이 동서로 나란히 3개씩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중앙의 목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측에 석탑이 있었다. 서탑이 해체되며 무왕의 정치적 이념인 미륵사상이 담겨 있어야할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는 의외로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법왕의 사리를 모신다는 내용이 출토되었다. 미륵사의 세 개의 탑 가운데 중앙 목탑은 미륵신앙을, 좌우에 배치된 석탑은 법화신앙을 지향하는 혼재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법화사상과 미륵신앙을 하나로 융화시켜 정치적, 사상적 통합을 이끌고자한 시대상을 반영한다.

 

 

 

 

: 무왕의 꿈 :

 

 

미륵사는 위기에 놓인 백제의 부흥을 염원하는 현실적인 돌파구였다. 귀족들도 뜻을 모아 미륵사 창건에 앞장섰다. 하지만 연이은 대륙과의 외교실패로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아들 의자왕(義慈王)대에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멸망했다.

 

백제 700년의 마지막은 계백이라는 걸출한 장수와 황산벌전투로 종결된다. 질 줄 알았던 싸움이었지만 결사의 각오로 김유신의 대군에 맞서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백제의 충신이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는 허구성이 짙다. 패전국의 왕을 깎아내리려는 승자중심의 시선이 내포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의자왕을 그리 타락한 인물로 기록하지 않았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 서동, 고향에 묻히다 :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서동은 태어난 곳에서 차로 불과 5분 거리에 잠들었다. 익산쌍릉(益山雙陵, 사적 제87호)은 1916년 조사 당시 이미 도굴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 능을 대왕릉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릉이라고 부른다. 출토유물은 없지만 무덤 안의 구조로 보아 백제 후기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미륵사지와 익산 왕궁 유적이 가깝고 백제 무왕의 고향인 점으로 미루어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한다.

 

용의 아들로 표현된 서동과 신라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에는 신라와 백제간의 정략결혼을 미화시키고자하는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것 같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서동요는 전쟁을 종식시키고자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이신효 (왕궁리유적전시관 학예연구담당 / 미륵사지 발굴조사관 / 논문 「왕궁리 유적의 성격」 외 다수)

 

Q 익산은 정말 백제의 도읍지였나?

 

A 왕궁리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다. 지명으로만 보더라도 옛날에 왕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왕궁터였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면서 백제 무왕시대의 궁성이자 후대에 사찰이었던 곳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웅진, 사비에 버금가는 백제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사찰은 대관관사(大官官寺), 왕궁사(王宮寺), 관궁사(官宮寺) 등의 이름으로 통일신라말기까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Q 무왕이 익산을 도읍지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A 안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후로 수십 년간 왕권이 많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왕권강화라는 큰 책임이 있었고 익산의 세력과 손을 잡았을 것으로 본다. 사자사의 지명법사와 좌평 사택 가문은 무왕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을 것이다.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한 것 역시 미륵신앙을 빌려서 무왕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Q '무왕길'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A 둘레길 열풍이 불면서 지역에 의미 있는 길을 걸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익산시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함께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게 되었다. '무왕길'은 무왕대의 왕궁터, 국립사찰이었던 미륵사지, 익산토성, 무왕과 왕비의 사후 안식처인 쌍릉 등을 걸으면서 무왕이 익산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백제의 숨결을 보고 느끼는 길이 될 것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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