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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백제 무왕의 길을 찾아서 1]
등록일
2012-01-02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043

 

 

 

 - 백제 무왕의 길을 찾아서

 

 

 

 

: 공주의 남자, 서동 :

 

 

 

'무왕'을 찾아 떠나는 '문화유산 여행길'은 한 자락의 노래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4구체로 된 국문학 사상 최초의 향가이자 유일한 동요인 '서동요(薯童謠)'이다.

 

때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632) 재위시절. 후에 백제 무왕(武王, ?~641)으로 등극하는 서동(薯童)은 글자 그대로 마(薯)를 캐며 살았던 남자였다. 그러다 신라 선화공주의 소문을 들었다. 선화공주는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는 덕만과 김춘추를 낳은 천명의 동생이 된다. 마장수이자 작곡가이자 공주의 열렬한 팬이었던 서동은 서라벌에 잠입하여 궁중주변의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자신이 만든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는 선화공주는 남몰래 정을 통해 맛동방(마 캐는 아이)에게 맛동방에게 밤에 알을 안고 간대요~ 간대요~."

 

 

 

 

서동의 로맨스는 선화공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스캔들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유배길에서 서동은 공주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함께 백제로 향한다. 서동이 마를 캐던곳은 익산토성이 세워져 있는 오금산(五金山)으로 이들 부부는 이곳에서 금 다섯 덩이를 얻어 진평왕에게 전하게 되고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서동이 신라왕의 지지와 선화공주의 내조에 힘입어 지역의 인심을 얻고 백제의 30대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과정에서 미륵사지 석탑의 창건 내력을 담은 금판이 출토되며 무왕의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었고 서동의 사랑이야기는 혼란에 빠졌다.

 

 

 

 

 

: 왕궁리에서 발견한 익산 경영의 흔적 :

 

 

B.C.18년, 마한(馬韓) 50여 개의 소국 가운데 십제(十濟)가 주변 국가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이 커지자 백제(百濟)로 국호를 바꾸고 신라, 고구려와 함께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형성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초기 도읍지를 위례성(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으로 추정)으로 삼았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의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22대 문주왕이 웅진성(지금의 공주 공산성)으로 천도하였으며, 538년 26대 성왕이 사비성(지금의 부여 부소산성)으로 옮겨갔다. 이후 무왕 제위 후 익산 왕궁리로 천도하였다가 말년에 다시 사비성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다.

 

 

왕궁리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왕궁유적과 사찰유적이 같은 위치에 중복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왕궁유적'은 삼국시대 왕궁으로는 최초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밝혀졌으며, 축성과정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통해 조성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남측담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3개의 문은 중국 고대 왕궁의 건축양식과 같은 것이었다. 왕궁의 전반부는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생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고, 후반부는 후원 숲과 더불어 귀중품을 생산하던 공방으로 사용되었다. '사찰유적'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고 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탑, 금당, 강당등 사찰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본다. 사찰이 들어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왕궁의 서쪽에 무왕릉과 왕비의 능이 조성된 이후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의자왕이 비어있던 왕궁을 개조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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