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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명성황후 이야기 2]
등록일
2011-12-12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902

 

 

 

 

: 아버지와 아들 :

 

 

운현궁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또한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국혼례)가 이곳에서 있었다. 이하응은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비록 왕족이기는 했지만 가세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섭정하며 운현궁의 위용은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해 졌으며 창덕궁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통로까지 있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판치던 조선후기, 이하응은 파락호로 행세하며 목숨을 부지했고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1863년 철종이 재위 14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는 양자인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다. 고종은 조선 제26대 왕으로 즉위했고 이하응은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져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에 신물이 난 흥선대원군은 아비도 남자 형제도 없는 몰락한 명문가의 규수인 민자영을 고종의 배필로 선택했다. 훗날 며느리가 가장 강력한 정치적 맞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고종은 1872년 민비를 주축으로 한 대원군 반대세력을 등에 업고 친정(親政)을 선포하지만 준비 없는 개방과 변화는 많은 문제를 야기했고 왕권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물가상승과 사회불안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야욕과 맞물리며 역모와 군란, 정변으로 이어졌다.

 

 

 

 

 

 

 


: 흥선대원군묘 :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무리한 세금으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강행한 서원철폐는 분서갱유를 지시한 진시황을 떠올리게 했다. 집권 초기의 개혁정치로 국방력은 강해졌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쇄국정책은 전쟁을 불러왔고 서구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는 놓쳐버렸다. 섭정이 끝난 후에도 정치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에 연루되기도 했다. 임오군란 때는 궁에 난입한 군인들을 피해 피신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중국 천진(天津)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세력에 손을 뻗었으며, 갑오경장(갑오개혁) 때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친러정부가 들어서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1898년 1월 부인의 죽음을 본 다음 달에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에서 생을 마감하고 뒤뜰에 묻혔다. 한성부(漢城府)에서 7일장을 치렀으나 고종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도피와 은거,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며 폐위되기까지 명성황후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살았다.『 조선견문록』을 기록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호톤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국익을 위해 헌신하며 국민의 복지를 생각하는 여인으로 외국의 궁전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조선 사람이었으나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기억했다. 또한 '세계 강대국과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섬세한 감각의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하였다.


어린 시절 '개똥이'로 불리며 평범한 삶을 살았던 고종 역시 아버지에 의해 12살에 왕이 되어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흥선대원군의 꼭두각시 역할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외세에 맞서고 국권을 지키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기까지 그는 진정한 지도자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고 1919년 1월 21일 오전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살아생전 대한제국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장례일에 3·1운동이 일어나며 민족혼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서『조선왕비실록』『조선의 왕』『궁녀』등)


 

Q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대립관계이기만 했는가?

 

A 흥선대원군을 위시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는 외척세도로 추락해가던 전주 이씨 왕가를 일으키고자하는 일에는 한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왕권을 누가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대해서는 입장차가 있었다. 고종이 미성년이었을 때는 몰라도 성년이 된 왕을 밀쳐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해결방법은 대원군이 물러나거나 고종이 확고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착한 아들 고종은 분명한 의사표현을 못했고 대원군은 아들이 미덥지 못해서였는지 권력욕 때문이었는지 권좌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였던 그들은 한 목표를 가졌지만 주도권 싸움에서 대립각을 늦추지 않았다.

 

Q 고종의 정치적 지도력은 어떠했는가?

 

A 고종은 후덕한 덕장(德將)의 리더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화시대에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19세말 조선의 상황은 보다 강력한 지도력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종이 제자리를 지키고 힘 있는 정치를 펼쳤더라면 명성황후가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상황과 고종의 여린 성격 탓에 아버지를 물러나 쉬도록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선택은 아버지가 스스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중전인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충돌이 잦았을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근대사의 최대 정적관계는 유교적 관습을 넘어서서 왕권을 구축하지 못한 고종의 책임이었는지도 모른다.

 

Q 명성황후의 정계입문을 어떻게 보는가?

 

A 시대는 정계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지도력을 그리워할 만큼 어수선했고 이러한 공백을 명성황후가 채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이라면 남편을 대신해 직접 전면에 나서서 국정운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왕실의 불화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군주제 국가가 소멸해 가는 시점에 태어난 불운의 인물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여행을 통해 한반도의 마지막 군주제가 사라져가는 대미(大尾)를 깊이 상고해 보기를 바란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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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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