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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명성황후 이야기 1]
등록일
2011-12-05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087

 

 

 

- 명성황후 이야기

 

 

 

 

: 경복궁,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몰락까지 :

 

 

경복궁을 법궁(法宮) 또는 정궁(正宮)이라 부르는 것은 임금이 정무를 보며 생활하던 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해 지어 놓은 곳을 이궁(離宮)이라하는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燒失)되기 이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으로 사용되고 경희궁이 이궁의 역할을 감당했다. 임진왜란 후 일부에서 경복궁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경복궁 중건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초래된다는 여론에 밀려 결국 창덕궁을 복구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고종 2년(1865)에 와서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시작된 경복궁 중건은 고종 4년(1867)에 마무리 되었고, 1868년 경복궁은 270여년 만에 궁궐의 주인을 맞이하게 되지만 수난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고종 10년(1873)에 발생한 화재로 내전 360여 칸이 불에 탔고, 다시 3년 뒤에 대화재로 내전 830여 칸을 잃어버렸다. 급기야 1895년 을미사변 때는 일제의 침입을 허용하며 반일세력의 핵심인물이었던 명성황후가 궁궐 안에서 시해되기에 이른다.

 

 

정권은 친일파 내각이 장악했으며 명성황후는 궁을 탈출한 것으로 조작되어 폐서인(廢庶人)으로 전락되었다. 고종 역시 이듬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1910년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국권을 강탈당하며 조선의 으뜸궁궐인 경복궁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훼손되고 유린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 뛰어난 외교력과 통찰력의 리더십 :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생가는 6대 조부인 민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의 묘소관리를 위해 지어진 묘막이었다. 명성황후의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전해진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직계후손으로 현숙한 여인으로 알려진 부인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민자영을 낳았다. 간혹 벼슬에 나아가기는 했지만 대대로 이곳에서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살았다고 전해지며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감고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지냈던 한양에 있는 민씨 종가는 조선 19대 왕인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해 지어준 곳으로 인현황후의 부친인 민유중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의해 폐서인이 되어 복위하기 전까지 거처한 곳이기도 하다. 인현왕후는 지금은 '동이'로 더 알려진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를 잘 보살펴 주던 인자한 왕비로 조명되기도 하였다. 후에 영조 임금이 인현왕후가 살던 집에 들러 왕후를 추모하며 '감고당(感古當)'이라는 이름을 지어 편액(扁額-현판)을 내렸다.


명성황후는 국운이 풍전등화에 있던 개화기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구국이념으로 뛰어난 통찰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며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였다.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프랑스와 수교하며 개신교 포교를 수락하였으며, 여성선교사 스크랜턴이 세운 국내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는 등 고종을 도와 많은 외교적 업적을 이루었다. '명성(明成)'이라는 시호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고 나서 붙여진 것으로 살아서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로, 죽어서는 대한제국의 황후로, 비장한 각오로 일제에 항거한 유일한 왕실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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