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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대가야는 살아있다 2]
등록일
2012-05-14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670

 

 

 

: 대가야의 궁중 악사, 우륵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인 가야금을 만든 우륵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우륵박물관이 2006년 3월, 고령 정정골에서 개관했다. 악성(樂聖) 우륵의 생애와 가야 음악을 집대성한 업적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국내 유일의 가야금 전문 박물관이다. 가야인의 세계관과 음악관을 가야금으로 승화시킨 우륵의 삶과 예술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륵과 가야금'을 테마로 한 5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오백년을 이어온 전통악기 가야금(伽倻琴)은 바로 '가야'에서 만든 '금'이라는 뜻이며, 가야는 당시의 대가야를 가리킨다. 가야금의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天圓)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地方)한다고 한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본받고, 열두 개의 줄은 12개월을 상징하는 등 당시의 천문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嘉悉王)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악사가 되었다고 한다. 가실왕이 우륵을 발탁한 것은 단순한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가실왕과 우륵이 가야금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여러 역사서를 통해 우리민족은 노래를 좋아하고 춤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중요한 국가대사였고, 그 제사에는 악·가·무(樂·歌·舞)가동원되었다. '악은 같게 하는 일을 하고(樂者爲同)''예는 달리 하는 일을 한다(禮者爲異)'는 동양사상이 말하듯 음악은 정치적 통합의 도구였고 고대정치 행사의 정점인 제례에 반드시 필요했다.

 

가야금은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는 악기였다. 가실왕은 우륵에게 12개 지역에 해당하는 12곡을 짓게 하여 악(樂)으로써 대가야 세력의 결속을 도모하려했다. 우륵은 밖으로는 가야의 통합을 추구하고 안으로 백성을 예악으로 통치하려는 왕실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것이다.

 

 

 

 

: 대가야의 멸망 :

 

 

대가야의 번영을 꿈꾸며 연주했을 가야금 소리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주던 가야금 소리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사라져 가는 대가야를 그리워하며 가슴을 뜯는 슬픔으로 바뀌고 만다.

 

대가야의 중흥을 위한 가야금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백제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한 신라와의 동맹은 깨어지고 대가야의 정치세력은 친백제계와 친신라계로 갈라졌다. 가실왕의 죽음과 친신라계의 몰락으로 더 이상 우륵은 가야에 머물 수 없었다. 우륵은 신라로 망명해 진흥왕의 눈에 들게 되었다. 우륵은 자신의 음악을 신라에 맞게 편곡했고, 자신을 인정해준 진흥왕의 편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인에게 음악을 전수하며 가야금의 명맥을 이어갔다.

 

대가야는 562년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가 화랑 출신인 사다함을 필두로 5,000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가실왕의 후계로 추정되는 이뇌왕(異腦王)과 신라의 이찬(伊飡, 신라의 진골만이 될 수 있는 관등) 비조부(比助夫)와의 결혼동맹은 무참히 깨어졌고, 대가야의 마지막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월광태자는 승려가 되어 가야산 아래 월광사(月光寺)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가야 여러 제국 가운데 가장 강하고 화려한 문화를 영위했던 대가야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의 찬란한 문화 속에, 조선의 화려한 궁중악 가운데, 한민족의 뜨거운 예술혼에, 대가야는 언제나 살아 숨 쉬고 있다.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김재호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고령문화관광해설사)


 

Q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A 금관가야와 대가야는 각기 다른 시조를 두고있는데 바로 김수로와 이진아시다.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는 고려 중기『가락국기』의 내용을 인용한『삼국유사』의 내용으로 '하늘에서 6개의 알이 내려왔는데,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나온 동자들은 5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설이다.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는 신라 말 최치원이 쓴『석이정전』의 이야기를 인용해 실은『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것으로 '가야산에 살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고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설이다.

 

Q 대가야의 실체는 무엇인가?

 

A 흔히 가야를 생각할 때 신라의 측면에서 본 가야, 혹은 금관가야 중심의 가야가 지배적이었다. A.D.42년 건국되어 562년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 대가야는 영욕(榮辱)의 세월을 보냈다. 발굴된 유적이나 문화재를 볼 때 다른 가야국들에 비해 문화적 수준이 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한때 신라에 버금가는 영토를 가진 한반도 제4의 세력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멸망 후 역사 속에서 빠르게 잊혀져갔고, 대가야 왕궁지만 보더라도 신라시대에는 불교의 사찰로 조선시대엔 유교의 요람인 향교로 사용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Q 가야의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A '가락국'으로 불리어진 가야는 4세기까지는 금관가야를 지칭했고, 5세기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대가야를 의미한다. 신라와 마지막까지 싸웠던 '가야'는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금관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흡수되고 대가야는 30년 후 신라의 침공으로 사라진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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