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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대가야는 살아있다 1]
등록일
2012-05-08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943

 

 

 

- 대가야는 살아있다

 

 

 

 

: 대가야국 불멸의 외침 :

 

 

『삼국유사』는 가야를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 고령가야(高寧伽耶-상주), 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 소가야(小伽耶-고성), 대가야(大伽耶-고령), 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가야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는『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이 책은 최치원이 지은『석이정전』을 인용해 가야산신(伽耶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이진아시와 금관가야왕 김수로를 낳았다고 전한다. 대가야는 A.D.42년 건국되어 562년 멸망할 때까지, 최초의 왕 이진아시로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에 걸친 왕조를 이어온 한반도 제4의 세력이었다.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는 대가야는 520년 동안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신라 백제 고구려와 함께 문화적·예술적으로 뛰어난 유물들을 남겼다. 금관가야가 주축이된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고구려에 타격을 입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신라로 흡수되었다. 5세기 이후에는 경상도 내륙 고령 등지에서 제철기술과 농업기반을 바탕으로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등장하였다.

 

 

대가야는 뛰어난 제철기술과 공예품, 가야금 제작 등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였지만 강대국들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제한되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고, 562년 신라의 침공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너무 일찍 한반도에서 잊혀진 이름, 대가야! 그러나 그들이 남긴 족적은 세월을 넘어 소중한 문화유산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 대가야 박물관과 대가야 왕릉전시관 :

 

 

대가야 왕들의 무덤인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 사적 79호)'에서는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하여 왕이 쓰던 화려한 장신구 등이 출토되며 대가야의 실존을 세상에 알렸다. 두 차례 도굴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반출과 자연재해로 인한 유실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1977년 지산리 44호 고분의 발굴로 이전까지 문헌상으로만 전해지던 대규모 순장(殉葬)의 흔적이 국내 최초로 확인되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왕의 관을 중심으로 순장자 돌방 32기가 방사형으로 놓여 있었고, 남녀 구분 없이 8세부터 50세까지, 시녀 무사 마부 일반인 등 다양한 신분으로 추정되는 인골들이 발굴되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지산동고분군 제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한 전시관으로 2000년 9월에 문을 열었다. 관람객들은 실물크기로 만든 모형 무덤 속에 직접들어가 왕릉의 구조와 축조방식,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등을 실제로 볼 수 있다. 전시 면적은 총 904㎡에 달하며 전시 내용은 44호분의 순장 유형, 대가야 출토유물 및 유물의 모습과 설명을 담은 사진 등이다.

 

2005년 4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에서는 지산동고분군의 출토유물을 비롯한 대가야의 유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으며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과 왕릉전시관이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들도 쉽고 생생하게 대가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능선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지산동 고분군을 만날 수 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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