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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지리산 산림처사를 만나다 2]
등록일
2012-04-23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818

 

 

 

: 삼우당 문익점 :

 

 

흔히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1329~1398)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 의류문화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세종대왕이 영의정으로 추승할 만큼 여말선초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효행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도천서원은 1401년에 창건하여 1554년(명종 9)에 사액서원으로 승격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다시 중건하여 1787년(정조 11년)에 재사액 되었다.

 

인근에 있는 목면시배지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씨앗을 숨겨 온 문익점이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 재배를 성공한 최초의 땅이다. 삼우당은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 솜옷 한 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진정한 학자였다.

 

 

 

: 성철 스님 :

 

성철(性徹, 1912~1993) 스님 역시 지리산이 낳은 대 사상가이다. 그는 산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5세에 출가하여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피폐해진 한국불교를 정화하기 위한 선풍(禪風)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81년 한국불교의 종정(宗正)이 되어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의미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본인은 사리비도 세우지 말라고 했지만 그의 생가에는 갑자기 '겁외사'라는 절이 생겼다.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집과 불경 국역집을 남긴 스님은 '승려는 수행만이 중생을 위하는 길'이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암자에 칩거하며 정진수도에만 전념했던 대표적인 선승이다.

 

 

 

 

: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 :

 

 

지리산 초입에 자리 잡은 남사예담촌은 경상도의 대표적인 전통한옥마을이다.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의 '예담촌'은 표면적인 의미로 '옛 담'을 의미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옛 담 너머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엿볼수 있는 곳이다. 돌담길은 모두 3.2km 가량으로 돌담 사잇길을 거닐며 느릿한 여유와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특히 돌담길 양쪽에서 뻗어 나온 회화나무 두 그루가 X자로 엇갈려 자라고 있는 이씨 고가와 솟을대문을 갖춘 문중재실인 사양정사(泗陽精舍)는 꼭 챙겨 보아야 할 곳으로 꼽는다. 염색제로 쓰이는 회화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훌륭한 인재가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함양 상림 :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으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당당하게 당나라의 관직에 오른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당시 황소가 읽다가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작성한 장본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상림은 최치원이 천령군(옛 함양) 태수로 부임해 조성한 아름다운 인공숲이다. 함양군청 앞에는 최치원이 자주 올랐다 하여 학사루라 부르는 누각이 있는데 조선시대 정여창의 스승인 김종직이 이곳 현감로 있을 때 유자광의 글씨가 학사루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태운 것이 불씨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정민용 (한국문화유산정책활용연구소 사무국장)

 

Q 산청과 함양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콘텐츠는?

 

A 지리산하면 불교문화를 꼽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지리산자락의 산청과 함양은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학식 있는 선비들이 지역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양성에 힘쓴 선비문화가 발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남명 조식의 사상은 남명학(南冥學)으로 분류되며 낙동강 서쪽 경남지역일대의 주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지역에만 20여개의 서원이 존재한다.

 

Q 남명의 학문적 특징은 무엇인가?

 

A 청렴한 선비정신의 대표적 학자로 평소 단검을 가지고 다니며 스스로 목에 칼을 겨누는 심정으로 학문연마에 매진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나라가 위급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언행일치의 본을 보였다. 임진왜란 3대 의병장인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I沔)이 모두 남명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Q 문익점과 선비문화의 연관성은?

 

A 세간에 이야기되고 있는 사실만 놓고 보면 문익점이란 인물은 밀수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여말선초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효행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삶과 행동을 지배해온 사상의 전반을 알 필요가 있다. 문익점은 죽은 후 세종 22년에 영의정으로 추승될 만큼 뛰어난 선비였고 사후 도천서원이 세워져 그의 사상을 기리고있다.

 

Q 선비문화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A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의 차이로 여러 가지 폐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시선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꽃피었던 시기를 돌아보며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문화 조차도 전통문화로 받아들이는데 유교적 선비문화의 수많은 장점들을 계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선비문화는 충분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각 지역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깊이 있는 이해가 요구된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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