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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호남 성리학의 와룡봉추 2]
등록일
2012-03-19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043

 

 

 

: 고봉 기대승, 퇴계를 만나다 :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중요한 사상가이다. 기대승의 가문은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함께 희생된 숙부 기준(奇遵)으로 인해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자리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어린시절 고봉은 병으로 죽을뻔한 적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8세에 모친을 여의였고 10살 때 누이가 병사했다.

 

병약한 탓이었을 수도, 여러 가지 형편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기대승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일곱살에 학문을 시작했다. 23세에 사마시(司馬試)를 합격했지만 25세에 응시한 알성시(謁聖試)에서 부당하게 낙제하여 귀향하였다. 그러나 28세에 동당향시(東堂鄕試)에 장원을 하며 그의 학문을 과시하였다. 또 32세에『주자문록』을 완성하였고 33세에 문과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며 퇴계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당시 '동방의 주자'로 추앙되던 퇴계와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막 과거에 급제한 고봉은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를 방문하였고 퇴계의 학설과 성리학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四端(사람의 본성인 理,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七情(사람의 감정인 氣, 희·노·애·락·애·오·욕)은 성리학 연구의 중심주제였다. 그들은 깊은 사상적 교류를 통해 26년의 나이차이를 뛰어넘었고, 두 사람의 편지는 이황이 별세하기 한 달 전인 1570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퇴계는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기도 했고 고봉 역시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하여 그의 의견을 수용하며 논쟁을 끝맺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에 버금가는 젊은 고봉의 높은 학식도 대단하지만 한참 어린후배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경청하며 끝까지 유연한 자세로 임했던 퇴계의 겸손 또한 되새겨 보아야할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 월봉서원 :

 

 

 

 

 

고봉은 22살에 결혼해서 부인 이씨와 4남 3녀를 두었는데, 1남 2녀는 어려서 죽었다.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곱 살짜리 둘째 아이가 무엇이든 빨리 깨우쳐 사랑스러웠는데 갑자기 병으로 잃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고봉은 46세의 길지 않은 인생 가운데 유난히 가족들의 죽음을 많이 보았다. 사랑표현이 요즘같지 않았을 그때 술기운을 빌어 아내에게 전하는 마음이 진하게 다가온다.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이 죽은 후 호남 유생들이 그를 기리며 세운 망천사(望川祠)에서 유래한다. 그의 위패를 모신 망천사는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월동으로 옮겨졌고, 1654년에 효종이 '월봉'이라는 서원명을 내리면서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 뒤 월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으나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건축했고, 1978년에는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건립에 착수하여 1981년 완공하였다.

 

현재 월봉서원에서는 '월봉서원 드라마 판타지아'와 '월봉서원 철학스테이' '21세기 어린이 선비교실'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내용은 어린이 철학 인형극, 동화·설화 이야기방, 고봉 전설 연극마당, 몸으로 배우는 한자교실, 월봉서원 퍼즐놀이, 달밤에 즐기는 전래놀이, 애일당 선생님의 별이야기 등으로 서원에서 느낄 수 있는 교육적 요소를 창의적으로 프로그램에 담아내고 있다.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임준성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교수,『고봉과 현대의 대화』공저)

 

 

Q 유학사에서 하서 김인후의 위치는?

 

A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과장된 부분이 있다. 당시 세자를 가르칠 수 있는 신분은 3정승밖에 없었다. 하서는 세자시강원 설서(지금의 조교)로서 인종과 각별한 사이가 된다.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는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한다. 도학(道學)의 태산북두였던 조광조의 도학사상을 연구·발전시켰으며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Q 사칠논변(四七論辯)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A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불교를 숭상하는 문정왕후와 유교를 따르는 사대부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었다.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고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지면서 임꺽정과 같은 의적이 활동하는 등 민심은 흉흉해졌다. 퇴계는 예의가 법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회적제도와 규범을 강조하는 이(理)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고, 고봉은 동기와 환경에 기반을 둔 기(氣)를 중요시했다.

 

Q 고봉의 학문적 성취는 어느 정도였는가?

 

A 퇴계와의 서신교류 가운데 퇴계는 아들뻘 되는 고봉을 항상 예우했다. 퇴계의 훌륭한 인품 탓도 있겠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와 사상을 논할 만큼 학문적 깊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宣祖)가 낙향하는 퇴계에게 학문에 조예가 깊은 선비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기대승의 학문은 가히 통유(通儒)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서슴없이 천거했을 정도였다.

 

Q 하서와 고봉의 교류는 어떠했는가?

 

A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많은 시간을 교제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하서가 벼슬을 하며 한양에 있을 때와 고봉이 한양에 있을 때가 서로 엇갈리기 때문이다. 하서의 전체문집을 살펴보면 고봉에게 단 두 편의 시를 보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답시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헌자료상으로만 봤을 때 그리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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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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