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설명
- 제목
- [ 8회연재_①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 성곽
- 등록일
- 2007-04-20
- 주관부서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1107
-서울성곽-
글 : 유홍준 문화재청장
서울 성곽 (사적 및 명승 제10호)
1392년 7월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겨울철을 앞두고 공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반대하자, 시기를 연기하여 궁궐과 종묘, 사직, 관공서 등을 건축한 뒤에 천도하기로 하였다.
이듬해(1393년) 정월에 권중화權中和가 풍수지리학상 계룡산이 새 도읍으로 가장 좋은 곳이라고 건의하자, 태조는 직접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지관들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내려가 신도新都를 정하고 각 도에서 인부를 차출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륜河崙이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의 지리서를 이용하여 계룡산 신도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태조는 일단 공사를 중단하고 권중화, 정도전鄭道傳 등을 불러 하륜이 제기한 문제를 검토하도록 했다. 그 결과 계룡산이 신도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신도 후보지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신도 후보지가 저마다의 풍수 이론에 따라 이견이 크자 태조는 재위 3년(1394) 8월8일부터 13일까지, 무학대사를 대동하고 자신이 직접 현장을 시찰한 다음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하여 도시 건설 전체를 맡기고, 9월에는 신도조성도감新都造成都監, 신도읍 조성 임시 본부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하여 종묘, 사직, 궁궐, 도로, 시장 등 도시계획을 작성하였고 그해 12월에 종묘의 터 닦기를 시작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약 10개월 후인 태조 4년(1395) 9월29일에 대묘와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충당하였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충청도의 민간 장정들은 농한기인 1, 2월과 8, 9월 가을에만 동원하였다.
경복궁, 종묘, 사직단 건립이 완성된 다음 달인 윤9월, 태조는 곧바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함과 동시에 정도전에게 도성 축조 기본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이때에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엇갈려 인왕산 선바위를 서울 성곽 안으로 할 것인가, 바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조선불교통사》에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양쪽의 주장이 너무 강하여 태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날 큰 눈이 내렸다. 이튿날 아침 한양의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여전히 녹지 않고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때 인왕산 선바위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서울 성곽 바깥쪽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결정된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이었다. 서울 성곽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는데,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만 하기로 하고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 49일 동안에 걸친 1차 공사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 11만8천 명을 동원하였다. 이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는 전 해에 궁궐 공사 때 차출되었기 때문에 면제시켰고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상의 임무를 고려하여 동원하지 않았다. 1차 공사에서 서울 성곽은 대부분 완공되었고, 다만 동대문 지역은 웅덩이로 되어 있어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기초를 다져야 했기 때문에 늦어질 수밖에 없어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성곽의 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척(약 180m) 기준으로 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하였고, 각 구역을 북악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돌면서 천자문千字文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 자부터 조민벌죄弔民罰罪의 조弔자까지 이름을 붙였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척 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부근 자연 암반 절벽을 그대로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가을 농한기인 8, 9월에는 49일 동안 7만9천4백 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문루의 누각들은 공사 후 건축 기술이 뛰어난 승려들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2년 뒤인 태조 7년(1398)에야 준공되었다.
그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1422), 세종은 서울 성곽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정비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는 결과적으로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이었으며, 1, 2월 농한기 38일 동안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천2백 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 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이후 서울 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 동안 성곽은 부분적으로 보수했을 뿐 크게 붕괴된 곳은 없었다. 본래 서울 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성江都城, 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에 맺은 ‘삼전도 맹약盟約’ 중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서울 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근 70년 지난 숙종 30년(1704)에 이르러,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 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 공사는 6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서울 성곽이 정비되자 숙종은 이듬해인 재위 37년(1711), 곧바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하여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 성곽이다.
이후 고종36년(1899)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를 부설하기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려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 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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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간한 [북악산 서울성곽]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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