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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지정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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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 명칭 변경을 건의합니다
작성자
조인희
작성일
2024-01-25
조회수
59

한 작품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은 해당 작품의 충분한 가치와 명분,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에 부합하는 정확한 작품의 명칭은 그 중요도를 대변한다. 따라서 아래 제시한 내용을 참고로 작품과 관련된 사항을 최종적으로 철저하게 재고하고 검증하여 《북원수회첩》을 ‘정선(鄭敾) 필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으로 다시 명명하고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해 제안한다.
첫째, 이 작품 命名에 대한 시기적 근거, 역사적 타당성의 재고가 필요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화첩에는 첫 장에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진 정선(鄭敾, 1676-1759)의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가 있고, 이어서 북원수회의 좌목(座目)과 당대 문사 15인의 시문, 그리고 정선의 그림에 대한 발문이 있다. 정선의 <북원수회도>는 1716년에 회방(回榜)을 맞은 이광적(李光迪, 1628-1717)의 회방연을 계기로 한 동네인 장의동(藏義洞)에 거주하던 70세 이상인 노론계 원로들이 이광적의 집 사랑채에서 그 자제들과 함께 한 모임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화첩의 겉표지와 그림, 글이 성첩된 시기등은 일부 기록으로 추정할 뿐 부가적인 명확한 기록이 없어 이 화첩이 당시에 어떻게 명명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이 첩의 가치에 따른 정확한 명명이 필요하다.
둘째, 이 화첩이 장첩된 결정적 계기를 정확하게 분별해야한다. 이 화첩은 1716년 모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지만, 화첩의 최종적인 장첩은 모임 당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1716년에 실질적으로 이 모임을 주도한 이는 정선의 외조부 박견성(1642-1728)이었으나, 그는 행사 당일 몸이 아파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를 아쉬워한 그의 3남이자 정선의 외사촌인 박창언(朴昌彦)이 당시 모임에 참여하지 못했던 김창집 등의 시문을 더해 1718년에 성첩한 것이다. 즉 이 화첩은 1716년 10월 22일 잔치인 ‘북원수회’모임 때가 아닌 정선의 <북원수회도>를 그려 수록한 것을 계기로 1718년 박창언에 의해 성첩된 것이다. 또한 수록된 박창언의 발문은 당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박창언이 정선의 행사 기록화를 보고 적은 <북원수회도>에 대한 발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일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서운함이 오래도록 맺혀있었는데, 지난번에 내형(內兄) 정군(鄭君) 원백(元伯)이 모사한 그림을 보니 그 형용이 섬세하고 빠트린 것이 없어(形容纖悉不遺) 흡사 실제 모습(眞像)을 보는 듯했다”고 적고 있어 정선의 그림이 이 화첩을 성첩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셋째, 이 화첩의 중요한 가치에 대한 판단이다. 이 화첩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의는 실려 있는 시문들 보다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이 산수화가 아닌 私家기록화이자 풍속화를 그려 남겼다는데 있다. 이같은 점은 이 화첩의 마지막에 실린 박창언의 발문에 그림에 묘사된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 즉 ‘사랑채에 앉아 있는 행사의 주된 참석자들뿐 아니라 당시 행사를 도왔던 시녀나 청지기 등의 모습 등 당시 행사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선이 北村의 私家에서 열린 행사의 면모를 그린 이 작품은 회화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 화첩의 중요한 가치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원래의 화첩명을 알 수 없는 이 화첩을 모임과 관련된 《북원수회첩》이 아닌 역사적, 문화사적으로 화첩의 가치를 분명하게 해 주는 ‘정선 필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이라고 명확히 명명하고 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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