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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국의 역사와 숱한 사연을 간직한 사찰 강화 전등사
작성일
2023-04-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94

호국의 역사와 숱한 사연을 간직한 사찰 강화 전등사 강화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해로부터 9년 뒤인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창건됐다고 한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삼랑성은 병인양요 당시에 양헌수 장군의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대패시킨 승전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01.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 산의 형세가 세 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듯해서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는 여인상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지는 때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오호십육국 중 하나였던 전진의 왕 부견이 고구려에 파견한 승려 순도와 사신에게 불상과 불경을 갖고 가게 해서 불교를 전파했다. 소수림왕 11년(381)에 동진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가다 강화도에 들러서 진종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 뒤 진종사는 고려 원종7년(1266)에 중창되었고, 고려 충렬왕 8년(1282)에는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왕이 태자였던 시절에 혼인했던 정화궁주가 대장경과 옥등을 시주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정화궁주는 17년 동안이나 태자비였으나 원나라의 제국대장공주에 밀려 끝내 충렬왕의 정식 왕비가 되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전등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큰 화마를 여러 번 겪기도 했다. 선조 38년(1605)에는 전등사의 절반가량이 불타버렸고, 광해군 6년(1614)에는 아예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광해군 7년에 다시 지어지기 시작한 전등사는 광해군 13년(1621)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전등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도 그때 완공되었다.


02.전등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석가불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배치되었다. 03.전등사 대웅전 처마 아래의 네 귀퉁이에 설치된 나부상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 규모인 전등사 대웅전(보물)에는 여덟 팔(八) 모양의 팔작지붕이 올려져 있다. 기둥 위쪽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지붕 처마를 떠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대웅전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네 모서리 기둥의 윗부분에 손바닥과 머리로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이 조각돼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상이 설치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불타버린 전등사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진행될 당시, 대웅전 건축공사를 맡은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았다. 그는 공사가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서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기 직전에 주모는 그동안 도편수가 맡긴 돈을 모두 챙겨 달아나 버렸다. 몹시 분노한 도편수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주모를 닮은 여인상을 대웅전 처마의 네 귀퉁이에 새겨 넣었다. 무거운 지붕을 온몸으로 떠받치는 고통과 벌거벗은 수치를 모두 견디면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참회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04.일제가 중국에서 징발해 온 전등사 철종. 그날의 뜨거운 함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할 것이다. 중국 북송시대에 만들어졌다. 05.삼랑성 동문 앞에 세워진 양헌수승전비 06.전등사 약사전 앞의 ‘어린왕자’. 이영섭 작가의 ‘어린왕자’ 조각상은 경내 곳곳에 놓여 있다. 07.2012년에 건립된 무설전 내부. 하얀 불상과 프레스코 기법의 후불벽화, 999개의 연등이 독특하다.

중국 종이 전등사에 오게 된 사연

전등사에는 대웅전을 포함해 약사전, 철종,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목조지 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묘법연화경 목판 등 총 6점의 보물이 소장 돼 있다.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아미타여래, 왼쪽에 약사여래불을 협시불로 배치했다. 조선 인조 원년(1623)에 수연스님을 비롯한 6명의 승려 조각가가 제작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전등사 철종(보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북송 철종 4년(1097, 고려 숙종 2년)에 제작됐다는 내용의 한자가 몸통에 새겨진 이종의 높이는 1.64m, 아랫부분의 직경은 1m쯤 된다. 문외한의 눈에도 우리나라의 것과는 확연히 달라 음통이 없고 형태도 특이하지만,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종들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애초 전등사에 전해 오던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징발됐다고 한다. 해방 직후 주지스님은 일제에게 빼앗긴 동종을 되찾기 위해서 며칠 동안 인천항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부평 군기창에 커다란 종 하나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종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에서 징발해 온 것이었다. 아쉽게도 전등사 종은 아니었지만, 마침 주인도 없다기에 주지스님은 이 종을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전등사에는 다른 고찰에 없는 불전도 하나 있다. 템플스테이 공간인 월송요 아래의 지하에 건립된 무설전이 바로 그것이다. 정문 지붕에 올라앉은 이영섭 작가의 어린왕자 조각상과 붉은 철판에 붙여진 ‘無說殿(무설전)’ 이라는 현판이 먼저 눈길을 끈다. 2012년에 건립됐다는 무설전의 내부는 매우 새롭고 독특하다. ‘인간적인’ 얼굴의 하얀 불상 5점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뒤에는 전통 탱화 대신에 서구식 프레스코 기법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 사방연속무늬를 만든 999개의 보랏빛 연등도 이채롭다. 가장 오래된 절에 가장 현대식으로 조성된 이 불전 이야말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완벽한 구현인 셈이다.


현재 삼랑성의 동문 앞에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08.전등사 현판이 내걸린 대조루. 1932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09.문루는 사라지고 둥그런 홍예문만 남은 삼랑성 동문

프랑스군을 격퇴시킨 승리의 역사현장

명산대찰에 들어가려면 대개 일주문을 먼저 지나야 한다. 하지만 전등사는 강화 삼랑성(사적) 안에 위치해 있어서 삼랑성 동문이나 남문(종해루)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 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듯한 지세의 정족산(231m)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정족산성’으로도 불렸다.


둘레 약 2.3km, 높이 2.3~5.3m의 삼랑성은 걸어서 한 바퀴 둘러보기에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전망이 시원스럽다. 강화도 일대의 산과 들, 마을과 바다, 전등사 전경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성 안에는 원래 전등사만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대몽항쟁기에는 가궐(임시궁궐),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와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들어서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최고 승려를 도총섭으로 임명해 전시에 승병 지휘의 임무를 맡겼다. 병인양요 당시에는 삼랑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에 앞서 병인년(1866) 9월 7일에 프랑스군은 강화 갑곶진에 상륙해 강화부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조선이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죽였으니 그 보복으로 조선인 9,000명을 학살하겠다”며 닥치는 대로 학살과 방화,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른바 병인양요가 발발한 것이다.


급히 강화부의 정족산성 수성장으로 임명된 양헌수 장군은 평안도 출신의 명포수 367명을 주력으로 한 선발대를 이끌고 은밀히 염하를 건너 정족산성에 잠입했다. 그 당시 조선군의 낡은 조총은 프랑스군의 신식 소총에 비해 사거리가 짧고 정확도도 훨씬 떨어졌다.


양헌수 장군은 성벽 뒤에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군이 근접했을 때에 집중 사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결과는 프랑스군의 대패였다. 프랑스군은 160여 명 가운데 전사자 6명에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한 반면, 조선군의 사상자는 전사 1명에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정족산성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군의 승리로 정족산사고의 조선왕조실록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현재 삼랑성의 동문 앞에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프랑스군을 격퇴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1873)에 강화군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그 앞을 오가지만, 그 비의 내력을 알고 나면 그날의 뜨거운 함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할 것이다.


가볼 만한 곳 1.강화 정수사 법당(보물)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창건된 고찰로 마니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 잡았다. 바다 조망이 시원스럽고 산사다운 고즈넉함이 살아있는 절집이다. 세종 5년(1423)에 고쳐 지었다는 법당(대웅보전)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에는 각양각색의 꽃을 꽃병에 꽂아놓은 것처럼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강화 정수사 법당 2.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우리나라의 북방식(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조형미도 빼어나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무게가 53톤이나 되고 길이는 6.5m, 너비 5.2m, 두께 1.2m에 이른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와 ‘부근리 고인돌 군’에 속하는 16기는 2000년에 전북 고창, 전남 화순 지역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 3.강화 초지진(사적) 경기도 안산의 수군기지가 조선 효종 7년(1656)에 이곳으로 옮겨져 설치된 해안 요새이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국군, 1875년 운요호사건 때에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그 당시의 포탄 자국이 지금도 성벽에 뚜렷하다. 오랫동안 허물어진 채로 성벽의 기초만 남아 있다가 1970년대에 복원되었다. 강화 초지진


글, 사진. 양영훈(여행작가, 여행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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