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고대 동북아 한류의 중심, 금강을 따라 걷다 - 금강
- 작성일
- 2018-06-29
- 작성자
- 문화재청
- 조회수
- 1793
백제문화권의 중심, 금강의 물줄기
한강, 낙동강에 이어 한반도 남쪽에서 세 번째로 긴 강, 고대 동아시아 문화가 싹 텄던 강, 금강은 전라북도 신무산 북동쪽에서 발원하여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등을 지나 군산만으로 흘러든다. 금강 유역은 공주, 부여를 포함하여 백제문화권의 중심이 되어왔다. 이것은 『당서』에 금강을 웅진강이라 불렀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주, 부여 등 금강 변에서 이토록 많은 백제 문화유적을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역시 이곳에 웅진과 사비, 두 도읍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인들만의 진취성과 개방성, 창조성이 문화유적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한류의 원조라 불리는 문화유적을 만나보기 위해 금강 변을 걷기로 한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했지만 너무 햇빛이 쨍쨍한 날보다는 걷기에 적당한 날이다.
웅진의 문화를 굳건히…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오늘의 첫 여행지는 금강 변에 자리 잡은 공산성이다. 웅진은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22대 백제 문주왕이 국가의 기틀을 바로 잡고자 천도한 곳이다. 공산성은 이때 지어진 산성으로 사비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해발 110m, 능선 위에 위치한 공산성은 위치 자체가 천혜의 요새답다. 크고 무거운 돌로 탄탄하게 쌓인 성곽을 보고 있으니 어떤 위협에도 안전하게 지켜줄 것 같은 믿음이 절로 생긴다. 이런 성곽이 2,200m 능선을 따라 연결되니 성곽길을 걷기만 해도 족히 한 도시를 다 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방형의 공산성. 금서루에서부터 차근차근 둘러볼 예정이다.
크고 무거운 돌로 쌓은 석성은 1,810m, 성곽 위에 올라서니 든든한 느낌이 든다. 시간이 오래 흘러서인지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 내린 성곽길은 오솔길처럼 탄탄하다, 외성구간은 백제에 쌓았던 토성으로 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성곽을 따라 한참 걸으니 먼 발치로 공주 시내가 보인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의 유물, 와당과 저수시설이 발견된 왕궁지가 있고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한 것을 기리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유적이 남아있다. 좀 걷다보니 금강교가 보이는 포인트가 나온다. 해발고도가 높아서인지 보이는 풍경이 시원하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음 장소로 자리를 옮긴다.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시대를 이끈 백제 왕들이 묻혀있는 능묘군이다. 남쪽으로 트인 구릉지역으로 편안하 고 금강이 휘감고 돌아서인지 절경이다. 표고 75m에 조성된 고분들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을 비롯해, 굴식돌방무덤 1-5호가 있고 주위에 수십 기의 고분들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 왕릉 내부도 보고 싶지만 직접 들어가기 어렵고 1997년부터 대안으로 조성된 모형전시관을 둘러본다. 무덤 안을 직접 본다니 한여름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모형전시관은 무령왕릉과 5·6호분을 체험할 수 있게 재현해두었으니 반드시 들러 보기를 권한다. 다시 구릉 사이를 지나 산책하는 마음으로 실제 무령왕릉을 보러 간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 고분 가운데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으로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기준이 될만큼 매우 중요한 왕릉이다. 출토된 유적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들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대신 그 앞에 조성된 쉼터에서 잠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간다.
웅진의 시원, 고마나루
이번에는 강변을 향해 걷는다. 고마나루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본 후 출발 전부터 가장 가고 싶었던 목적지 다. 금강, 넓은 백사장, 솔밭, 연미산이 어우러져 만들어낼 절경이 무척 궁금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솔숲이 나선다. 청량감이 든다. 이 숲속에는 곰 사당이 있다. 고마는 곰의 옛말이니 고마나루는 한자로 웅진(熊津)을 의미한다. 고마나루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인간과 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먼 옛날 연미산 동굴에 암곰 한 마리가 나무꾼을 잡아가 자식 둘을 낳았는데 곰과 살기 싫었던 나무꾼이 도망을 갔단다. 그러자 이를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강을 건너는 배가 뒤집히는 일이 많아 곰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단다. 평범한 솔숲이고 사당인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니 숲도 강물도 사당도 색다르게 보인다. 강 쪽으로 좀 더 발걸음을 옮기자 드디어 고요한 금강이 펼쳐진다. 고마나루터라 쓰인 입석이 보인다. 이곳으로 백제는 수많은 물자와 사람들과 문화를 실어 날랐으리라. 예전엔 물길이 가장 활발한 교역의 길이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그저 조용한 나루터가 된 고마나루를 한참 쳐다보았다.
바람과 강물과 새들이 쉬어가는 새들목섬
강변을 정비해서인지 걷는 길은 더없이 쾌적하다. 다만 내리는 비 때문인지 강물은 흐리다. 걷다 보니 금 강 속의 작은 섬이라는 새들목이 나온다. 금강의 모래가 쌓이고 쌓여 제법 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하중도 형태의 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서일까? 새들목은 그 이름처럼 천연기념물 제243-4호인 흰꼬리수리, 천연기념물 제323-8호인 황조롱이를 비롯 큰기러기, 큰고니, 새호리기, 참매, 원앙 등 18여종의 새들이 드나든다고 한다. 제법 규모가 커서 검색을 해보니 면적이 14만 ㎡나 된다고 한다. 풍경이 그럴 듯해서인지 2015년 초반 공주시에서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생태 파괴를 반대한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에 의해 개발 계획은 무산되었다. 새들목섬, 바람도 강물도 새들도 쉬었다 갈 수 있는 자연의 섬으로 오래 존재하기를 바란다.
박동진판소리전수관과 석장리 구석기유적
차를 타고 조금 멀리 떨어진 석장리 유적을 보러 가는 길, 잠시 박동진판소리전수관에서 발길을 멈춘다. 2003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박동진 선생은 완창 판소리로 새바람을 일으킨 명창으로 유명하다. 고즈넉한 돌담을 돌아 들어가니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보인다. 이곳에는 판소리전수관, 생활관, 유물전시관이 꾸려져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서니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외치던 선생의 판소리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아는 얼굴이 나오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어린 시절 청양의 손병두 선생을 찾아가 판소리계에 입문했다는 박동진 선생. 젊은 시절 잠시 무절제한 생활로 소리를 잃었던 그는 40여일 동안 생쌀을 씹으며 독공에 열중하기도 했고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일하기도 했고 하루 10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기도 하다 1968년 일생일대의 실험인 흥부가 완창에 성공했다. 그는 판소리 후진들을 키우기 위해 83세에 판소리 전수관을 개관했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이기도 하다. 유물전시관으로 들어서니 연습 때 이동하던 북, 부채와 의상 등을 볼 수 있다. 이제 곧바로 석장리 유적으로 향한다. 석장리 유적은 사적 제3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1964년 미국인 대학원생이었던 앨버트 모어와 그의 아내가 홍수로 인해 무너진 금강변 지층에서 뗀석기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발굴되었다. 석장리 유적은 지층이 27개의 층위로 되어 있고 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층도 11개 층 위나 된단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삶의 터전이 되어온 땅. 괜히 숙연한 마음이 든다. 석장리 박물관을 둘러본다. 석장리는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지이다. 발견된 석기들의 설명이 있고 구석기인들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존도 마련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구석기인들은 매우 창의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돌에서 칼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한류, 새로운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금강변에서는 매년 다양한 축제들이 열린다. 특히 올해는 7월 8일부터 7월 14일까지 ‘백제문화유산주간’을 개최하여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고마나루 등 금강과 어우러진 멋진 문화유산을 다채로운 행사와 함께 즐길 수 있다. 이 기간동안 단지 금강변만 아닌 백제역사유적지구(8개소)로 묶인 공주, 부여, 익산 일대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만나볼 수 있다.
나아가 문화재청과 지자체가 추진하는 문화재 원형보존 정비사업, 문화유산 활용사업, 문화유산 관광 자원 화사업이 성공적으로 안착되면 이곳은 스토리가 있는 역사유적지구로 세계적 관광지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문화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 곳곳으로 뻗어갈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한반도에 다시 평화의 물결이 일렁이는 지금, 우리 문화가 동아시아는 물론, 저 먼 유럽까지 날아갔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다. 평화의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돌아오는 길, 발걸음은 새로운 기대로 한껏 들떠 있었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