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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의 봄을 기다리며 임진강과 강화해협을 따라 걷다 - 임진강
작성일
2018-05-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992

하나의 봄을 기다리며 임진강과 강화해협을 따라 걷다 - 임진강 다시 6월이다. 그러나 올해의 6월은 지난해의 느낌과 사뭇 다르다. 60여 년을 이어온 분단의 땅에 해빙의 기운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북미정상회담이 이어지고 어쩌면 갈 수 없었던 북녘의 땅을 밟아볼 날이 그리 멀지 않게 다가올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나라 사랑의 달, 보훈의 달 6월에 우리는 또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회담의 결과를 기다릴 것인가? 아직은 빗장이 굳게 닫힌 북녘의 땅을 멀리서라도 바라 보고자 강화해협으로 달려간다. 역사적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수난을 많이 당했던 곳, 호국영령들의 뜻이 살아있는 곳, 서해 최북단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 이곳에 평화가 깃들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강화 땅을 밟는다. 강화도에서 바라본 북한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남과 북을 달리는 세 강의 물줄기

강화도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합쳐지는 하구에 있다. 한강은 서울에서, 예성강은 개경에서, 임진강은 남한과 북한 사이를 가르며 흘러와 마침내 강화만에서 긴 여정을 마친다. 강화해협은 헤엄을 치면 건너갈 만한 물길로 강과 같다고 해서 염하로 불려왔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일까? 몽골과의 항쟁부터 조선시대 이양선 출몰,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까지 강화는 유난히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왔다. 그때마다 강화는 육지와 섬 사이 염하라는 방어선과 넓은 농토로 국난 극복의 장이 되어 주었다. 김포를 지나 서쪽으로 한참을 달리니 강화해협이 나선다. 강화도는 섬 전체가 요새 같다. 해협을 면한 곳이면 어디나 진, 보, 돈대, 포대 등 군사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따라 강화 호국돈대길이 펼쳐진다. 차를 타고 강화초지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올라간다.

01.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광성보 02. 광성보 정문 안해루에 들어서면 전쟁 당시 사용하던 무기들을 볼 수 있다. 03. 전쟁이라는 테마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풀어낸 강화전쟁박물관
04. 강화 8경 중 하나로 꼽히는 갑곶돈대의 성곽길과 해협의 풍경
신미양요 辛未洋擾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으로 광성보는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검은 갯벌과 갈대들이 보이는 해협을 따라 가니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 안내판이 나온다. 사적 제227호 광 성보. 지도상으로 보면 바다를 향해 돌출된 지형으로 손돌목과 함께 물살이 급하다. 광성보가 강화도에서도 돋보이는 군사적 요충지가 된 이유다. 지금은 해안과 맞닿은 산책로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지만 이곳에선 과거 치열한 백병전이 있었다.

광성보의 정문 안해루로 들어선 후 정문 왼쪽 편으로 나오니 성벽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불량기, 소포, 대 포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한때 이곳이 격전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다. 광성돈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오른쪽 언덕을 오르니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나온다. 1871년 신미양요,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까지 도달했다. 이곳에서 격전을 치른 군사들은 전원 순국했다. 미군은 이 전투 후에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을 고려해 철수했다. 역사적 사실을 알고 보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무명용사비 뒤 쌍충 비각에는 광성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어재연과 어재순을 기리는 순절비가 있다.

해협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니 이번에는 손돌목이 나온다. 고려왕이 강화로 피난길에 나섰을 때 안내를 맡았다는 뱃사공 손돌. 갑자기 물살이 위태롭게 움직이자 의심에 찬 왕이 죽이라 명령했어도 손돌은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에 도착할 것입니다”라 말했다고 한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나랏님에게 충성하는, 착하고 순하고 안타까운 백성의 이야기를 담은 전설이다. 이어 광성보의 외곽 초소 겸 포대, 용두돈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거친 물살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해협에서 불어와서인지 제법 찬 바람에 땀을 씻고 차에 오른다.


병인양요의 격전지, 갑곶돈대

갑곶돈대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요새로 활용했던 곳이다. ‘갑곶’은 강화해협을 건너지 못한 몽골군이 ‘갑옷만 벗어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며 한탄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은 또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 부대에 패해 달아났다.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치열한 전장이었지만 현재는 너무나 평화로운 느낌이다.

주변에는 전쟁이라는 테마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풀어낸 강화전쟁박물관도 있다. 잠시 들러 우리나라의 전쟁사, 특히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전쟁사를 훑어보고 나왔다. 치열한 전장의 흔적은 이곳에 서식하는 나무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국방 서적 『관방집록』을 보면 느릅나무, 버드나무, 탱자나무, 가시나무 등을 빽빽하게 심어 외성을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갑곶돈대 옆에서 서식하는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수령이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는 고목이다. 혹자는 이곳에 유배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 연미정

해협을 계속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니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아름다운 정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 재 제24호 연미정이 나온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연미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던 이곳. 가슴 아픈 역사는 뒤로한 채 풍경은 고요하기만 하다. 특히 이곳에서의 달맞이는 강화 8경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하단다. 밤까지 기다려 달맞이를 할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05. 강화도에는 16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내륙 곳곳에 서 있다. 고인돌 지석묘 支石墓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실로‘고인돌 왕국’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약 3만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발견됐다.

내륙의 고려궁지와 강화 고인돌

이번엔 발길을 돌려 내륙으로 들어가본다. 강화도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1232년부터 1270년까 지 무려 39년간을 왕도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때 세워진 건물들 중 대다수는 소멸되고 강화 유수부 동헌이 고려궁지에 남아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찾아간 사적 제133호 강화 고려궁지는 역사적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물을 설치해두었다. 비록 본래 지어졌던 건물들은 아니지만 정문인 승평문을 지나 강화 유수부 동헌인 명위헌, 조선시대 사고였던 외규장각을 차례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외규장각 내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 궁궐의 주요행사를 그림으로 그려둔 의궤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것을 145년 만에 임대 형식으로 돌려받은 것이다. 의궤의 그림을 보니 새삼 그 세밀함에 놀라게 된다. 그림 하나하나를 바라보니 마치 왕이 행차할 때의 장엄한 의전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강화도는 역사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고인돌의 고장이기도 하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4호 부근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오상리고인돌군 등 강화도에만 160기 정도의 고인돌이 있다고 하니 두말할 필요 없다. 강화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로 크고 넓은 두 개의 돌에 편평한 덮개를 올려둔 형태다. 강화 부근리의 지석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니 넓은 부지에 교과서에서 봤던 그 고인돌이 서있다. 주변에는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 선사시대 장례 절차, 부근리 고인돌군 탐방로 등이 자세하게 안내 되어 있다.


평화 정착을 기원하며 강화평화전망대

날씨가 좋으니 육안으로 북한 땅을 볼 수 있다는 강화평화전망대를 가보기로 한다. 때가 때이니만큼 그곳으 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평화전망대는 아직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출입 시 초소에 출입 이유와 신분증 제시,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를 적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군사보호시설임을 경고하는 빨간색 경고판도 아직 우리가 분단국가임을 잊지 않게 한다. 1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빽빽하게 수놓은 통일기원 메모들이 보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민족의 염원이 정말 뜨겁게 느껴진다.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북한 땅이 보인다. 가까운 곳은 2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일제부터 프랑스, 미국, 몽골에 이르기까지 강화도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침탈했던 최전방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이 땅을 지켜냈다. 강화의 수많은 진, 보, 돈대들은 이런 호국 역사의 산 증거들이다. 그리고 이제 이 땅은 다시 다가올 평화의 길 초입에 서있다. 회담의 성과가 확정된다면 강화도는 북한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가장 먼저 맞을 곳이다. 선조들이 지켜낸 호국의 현장에 대대손손 이어져갈 평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북한 땅을 바라본다. 순간 마음에도 한 줄기 따뜻한 봄바람이 일렁이는 듯하다.

임진강과 강화해협 추천명소와 맛집 1.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 사적 제227호로 강화 12진보 중 하나. 신미양요 때 해병 450명으로 침입한 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격전지다. 우리나라는 당시 어재연과 어재순 등 수백명의 군사가 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원 순국했다. 무명용 사비와 장수들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이 세워져있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번지 2.강화해협을 지켜낸 갑곶돈대 - 사적 제306호로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다. 또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의 함대가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다행히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달아났다. 해협을 바라보는 곳에 세워진 돈대에서는 외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대포도 볼 수 있다.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80(박물관), 소백로 2740(서원) 3.풍광이 아름다운 고려시대의 누정, 연미정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4호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곳에 세워진 누정이다. 강화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경치로 누정 안에서 북한의 개풍군, 파주시, 김포시를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예전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이곳에서 닻을 내렸다가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4.강화도에서 유명한 갯벌 장어 - 강화도를 달리다 보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갯벌장어집이다. 일대가 한강과 인천 앞바다가 만나는 장소이고 민물과 짠물이 합류하여 뱀장어도 많이 서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갯벌장어는 소금을 찍지 않아도 바다의 짭짤한 맛이 살아있다. 강화도의 전통음식인 순무김치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으니 소금구이, 양념구이 골고루 맛보시길. *강화군 길상면, 선원면 등지 5.국난 극복의 산 증거, 고려궁지/외규장각 -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는 강화도에서 빼놓지 않고 가볼 만한 곳이다. 이곳은 고려 고종이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왕도를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는 환도하기까지 39년간 궁지로 사용되었다. 1977년 병인양요 때 소실된 건물을 보수 정화하여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알려주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규장각에 들러 의궤를 보는 것도 강력 추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6.북한 땅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육안으로 북한의 산과 들, 사람들까지 볼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있다. 전망대 곳곳에서 북한의 토산품과 북한 전경을 볼 수 있어 다른 지역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이북의 독특한 문화생태를 보다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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