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한국의 목가구 연구를 개척해나간 김삼대자
작성일
2017-07-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560

한국의 목가구 연구를 개척해나간 김삼대자 - 전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과장 한국 전통 목가구 분야의 대가 김삼대자(金三代子) 선생은 문화재관리국 초창기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학예직을 거친 여성 전문가다. 당시만 해도 남성 위주 사회였던 점을 감안했을 때 여성으로 25년간 한 분야에서 종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을 지나 현재까지 김 선생은 우리 전통 목가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품고 있다.  (좌)2013년 10월 네덜란드 민족학 박물관에서 한국 고가구를 조사중인 선생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우)1994년 국립민속박물관 상거래특별전 개막식에서의 김삼대자 선생 ⓒ국립민속박물관

학문 매진에 유리했던 유복한 가정환경

독특한 이름에 대해 묻자, 김삼대자 선생의 출생 배경을 알k 수 있었다. 삼대자(三代子)는 3대째 아들(만)이라는 뜻이다. 3대만에 집안에서 처음 태어난 딸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 덕분인지 그의 부모는 선생을 시작으로 내리 딸만 여섯을 두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름 때문에 하도 놀림을 많이 받아 개명까지 생각했다고. 기다리던 딸이었기에 집안에서도 충만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학문에 매진하기에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

“집이 유복했던 편이라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대학을 나와 사업을 하셨는데, 베이징으로 건너가 일본군에 군납품을 대셨어요. 거기서 작은오빠랑 저랑, 바로 밑 여동생이 태어났고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일가족이 귀국해서 삼청동에서 살게 됐어요.”

1919년생인 선친 김홍운(金虹雲)은 그 시절에 바이올린을 켰고, 사진이 취미였다고 하니 대단한 갑부였으리라. 1943년 1월 26일, 김삼대자 선생은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시작된 인연

김삼대자 선생은 1961년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하반기에 같은 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며 1969년 <이조시대 등촉(燈燭)기구에 관한 고찰>로 학위를 취득했다. 지도교수가 있었지만, 실제 스승은 당시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 선생이었다.

“논문 주제도 선생님이 지정해주신 거예요. 논문 쓴다고 한국전력에 소장 중인 등화구(燈火具) 유물들을 조사했고, 민속 박물관을 가기도 했죠.”

식민강점기에 기시 겐(岸謙)이라는 사람이 수집한 한국전력 소장 등화구는 나중에 국립민속박물관에 일괄 기증됐고, 이를 김삼대자 선생이 정리하게 됐다. 이때만 해도 그가 국립민속박물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논문 준비할 때에요. 민속박물관이 문화재관리국 한국민속관이라고 부르던 시절인데,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건물을 쓰고 있었어요. 등화구 조사한다고 한국민속관으로 갔더니만, 장주근 선생이랑 이종철 선생 두 분이 오들오들 떨면서 춥다고 햇볕을 쬐고 계시더라고요. 나중에 최순우 선생 추천으로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한국민속관은 1975년 4월 11일, 한국민속박물관(1979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개편)으로 마침내 이름을 바꿔 개관했다. 그 몇 달이 지난 시점에 김 선생은 임시직으로 들어갔다.

“그때 최순우 선생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계셨어요. 선생이 이치순 당시 문화재관리국장님을 부르시고는 ‘김 선생을 쓰시면 좋을 겁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시대적 상황 속, 순탄치 않았던 여성 학예사

임시직 생활을 석 달간 하고는 정식 학예연구사시보가 되어 25년간의 공직 생활을 하게 된 김삼대자 선생. 한국 목가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문가 김삼대자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오간 그의 공직생활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저는 왕따였어요. 당시 석사학위까지 있는 여자를 누가 좋아했겠어요. 그리고 제가 건방지기도 했나 봐요. 주변 사람들한테 그리 비치는 줄은 처음에는 몰랐어요. 입사 초기에는 일을 주지도 않더라고요. 덕분에 그 시간에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죠.”

그 시절 여자라고 해서 겪은 차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인터뷰 시리즈에서 바로 앞에 다룬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1982년, 학예연구관 심사에서 연구관 승진 대상자가 6명 중 그와 김삼대자 선생 둘이 떨어졌다는 말을 했다. 이 일을 물으니 “말도 마요. 그땐 면접으로만 연구관 승진 심사를 했는데, 사전에 이미 다 내정된 거였어요”란다.

그렇지만 그를 응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그 도움은 성과를 내는 데 자양분이 됐다. 김삼대자 선생이 1997년 도서출판 대원사에서 출간한 단행본 『전통 목가구』는 여전히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서와 같이 통한다. 김 선생은 퇴직 이후에 이런저런 자리를 오가며 목가구 유물 감정과 조사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 재단이 진행하는 해외 한국 문화재 조사사업에도 여러 번 참여해 의미 있는 작업을 함께 했다.

 

글+사진‧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