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조선시대의 청백리 이약동李約東과 허종許琮
작성일
2009-06-04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765

span style=''font-size:10.0pt;mso-bidi-font-size:11.0pt;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theme-font:minor-latin;mso-bidi-font-family:"Times New Roman"; mso-bidi-theme-font:minor-bidi;mso-ansi-language:EN-US;mso-fareast-language: KO;mso-bidi-language:AR-SA''>


청백리 이약동李約東 이야기

이약동(1416~1493)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
碧珍, 호는 노촌老村이다. 경상도 김천 하로촌(賀老村: 현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영남의 대학자였던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문하에서 배웠고, 그의 아들이었던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 교분이 깊었다. 1442(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1454(단종 2) 사헌부 감찰, 황간현감, 사헌부 지평, 청도군수, 사헌부 집의,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0(성종 1) 8월에는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재직 중에 관아 아전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키고, 조정에 바치는 공물貢物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준 선정으로 칭송을 받았다.

제주 관아에서 한라산의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산천단은 원래 한라산 정상부근에 있었다. 그래서 제사 때가 되면 많은 관리들과 군인들이 동원되어 며칠씩 산에서 야영을 하며 행사를 치렀는데, 혹한기에는 동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 보고하여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의 현재 위치로 옮기게 하였다. 이후에는 산신제 때문에 고통을 겪는 주민들이 없게 되었다. 곰솔공원에는 이약동의 산천단 이설과 관련된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약동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재임 중에 착용하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들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한참동안 말을 타고 가다보니 손에 든 말채찍이 관아의 물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성문 누각에 걸어놓고 서울로 갔다. 후임자들이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겨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 놓아 기념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게 되자 백성들이 바위에 그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기념하였는데, 그 바위를 괘편암掛鞭岩이라 하였다. 이야기는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도의 노인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제주도에서 뭍으로 가는 항해 중에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 파선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색이 되었는데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나는 이 섬에 와서 한 가지도 사리사욕을 취한 것이 없다. 우리 막료 중에 누군가가 부정을 하여 신명이 노한 것이 아닌가? 일행 중에 누구라도 섬의 물건을 챙겨오는 자가 있으면 내놓아라.” 하였다. 한 군졸이 나와행차가 막 떠나오려 할 때 섬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바치면서 바다를 건넌 후에 사또께 올려 그들의 정성을 표해달라고 하기에 숨겨 왔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약동은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