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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외국어 학습 교재들
작성일
2008-04-30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251



나면서부터 영어 정도는 구사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결코 허풍이 아닐 정도로 어느덧 외국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수품처럼 되었다.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간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외국어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예상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도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졌음이 눈에 띈다. 외국어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오늘날과 같은 학습 교재도 있었다.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와 「박통사」를 비롯하여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 등이 그것이다. [b]미스터, 중국인 『노걸대老乞大』[/b] 조선시대의 중심 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였다.

다만 모든 백성에게 중국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수행하는 역관들을 중심으로 중국어 학습이 이루어졌다. 물론 지식인층 중 상당수는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시대를 빛낸 학자 신숙주는 중국어, 여진어, 몽고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어 회화의 교재로는 『노걸대』가 있었다. ‘노’는 상대를 높이는 접두어로 우리말의 ‘씨’, 영어의 ‘미스터’쯤 된다. ‘걸대’는 몽고인이 중국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3명의 고려 상인이 말과 인삼, 모시를 팔기 위해 중국에 다녀온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적어 놓은 책이다. 상, 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노걸대』에는 말을 사고파는 법, 북경에 도착하여 여관에 드는 방법,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을 소개하는 방법 등이 중국어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실무에 필요한 실용 회화책이라 할 수 있다. 『노걸대』의 구성을 살펴보기 위해 첫 부분의 대화를 잠깐 소개해 보기로 한다. 大哥 ?從那裏來 (대가 니종나리래) : 형님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我從高麗王京來 (아종고려왕경래) : 나는 고려 왕경(수도; 개성)에서 왔습니다. 如今那裏去 (여금나리거) :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我往北京去 (아왕북경거) : 나는 북경으로 갑니다. ?幾時離了王京 (니기시리료왕경) : 당신은 언제 왕경을 떠났습니까? 我這月初日離了王京 (아저월초일리료왕경) : 나는 지난 달 초에 왕경을 떠났습니다. 한편 『신역노걸대新譯老乞大』와 같은 개정본에 이르면, 위에서 고려라 표현한 부분이 조선으로 바뀐다. 원래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던 『노걸대』였기 때문에 고려인이 주인공이었지만, 나라가 바뀌었으니 주인공도 조선 사람으로 된 것이다. 『노걸대언해』는 중국어 회화책인 『노걸대』 원문에 두 종류의 한자음을 달고 우리말로 언해한 책이다. 『노걸대언해』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쉽게 중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한글로 해설한 책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적은 번역서라고 볼 수 있다. 『노걸대』는 몽고어로도 번역이 되어 간행되었다.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는 몽고어로 『노걸대』의 내용을 싣고 우리말로 그 음을 달아 풀이를 해 놓은 책이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이미 멸망했지만 언젠가 몽고어가 필요한 시기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몽고어 학습에도 신경을 썼던 조선후기의 시대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2007년 5월 몽고대통령 부부가 규장각을 방문하였다. 방문 목적은 바로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를 보기 위함이었다. 몽고어 학습에 기울였던 선조들의 열정이 현대 한국과 몽고의 우호 협력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b]박씨 성을 가진 역관, [/b] 『박통사朴通事』 『노걸대』와 함께 대표적인 중국어 학습서로 꼽히는 교재는 『박통사』이다. 통사가 역관의 직책인 만큼 ‘박 씨 성을 가진 역관’이라는 뜻이다. 『박통사』의 내용은 106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걸대』가 상인의 무역활동을 주제로 하고 있는 ‘비즈니스 회화’에 가깝다면, 『박통사』는 중국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첫 대화는 날씨가 좋은 봄날 일행 30여명이 100전씩을 추렴하여 잔치를 준비하는 상황이며, 둘째는 고려에 간다는 중국 사신과 나누는 대화, 셋째는 장마에 무너진 담을 쌓기 위하여 담을 쌓는 사람과 흥정하는 내용 등을 비롯하여,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는 상황, 공중목욕탕의 요금과 때밀이, 차용증 쓰기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박통사』는 『노걸대』 보다 고급 단계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어서, 중국어와 우리말의 생생한 모습과 함께 풍속 및 문물제도까지 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박통사언해』는 『박통사』를 우리말로 풀이한 책으로, 『노걸대언해』와 함께 당시 중국어가 보급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들 언해본 학습 교재는 우리나라 중세 국어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일본어 학습 교재, 『첩해신어』 조선은 초기부터 일본과 교린정책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맺고 교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시대 외국어 전담 관청인 사역원에서는 일본어 역관들을 교육하기 위해 간행한 일본어 학습용 교재인 『첩해신어 捷解新語』를 간행하였다. 그런데 『첩해신어』의 초고를 쓴 강우성康遇聖의 경력이 재미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618년(광해군 10년) 경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였고, 숙종 때인 1676년에 『첩해신어』를 널리 간행하였다. 1415년(태종 15년) 사역원이 설치된 후 처음에는 한학漢學과 몽학蒙學만 개설되었다가 나중에 왜학倭學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첩해신어』라는 제목은 ‘신어, 즉 일본어를 빨리 해독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첩해몽어捷解蒙語』라는 책도 있는 것을 보면 ‘첩해’가 당시 회화책에 관용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첩해신어』는 큰 글씨로 일본 문자를 쓴 다음 그 오른쪽에는 한글로 발음을 적고, 왼쪽에는 우리말로 그 뜻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 일본을 왕래하는 사람 사이의 대화, 상거래 때의 대화, 조선 사절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대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국어 학습이 대부분 그렇지만 『첩해신어』에서도 일본어를 외우는 능력을 가장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의 역관 현경재라는 사람이 쓴 역과 시험 답안지인 『왜학시권倭學試券』을 보면, 『첩해신어』에서 여섯 부분을 정해 외어서 쓰도록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일본어 능력을 중시했던 면모가 나타난다. ▶글_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사진_ 신병주,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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