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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두산함 마스트가 주는 기억들
작성일
2015-11-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787

해군사관학교 해사부두에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463호인 백두산함 마스트(mast, 돛대)가 서 있다. 백두산이란 군함은 간곳없고 목재 마스트만 서 있는 이곳에서 어떠한 역사가 재현될 수 있을까? 백두산 마스트는 최소한 우리에게 3가지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험난했던 백두산함의 첫 여정

1945년 11월 11일 해군은 3군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었고, 올해는 해군창설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창설은 되었지만 해군은 일제가 버리고 갔거나 미군이 지원해준 보조함만 몇 척 보유하고 있었을 뿐 전투함은 한 척도 없었다. 더군다나 1949년 6월 경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를 해버렸다. 해군 초창기 선각자들은 전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미국에서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군함 구입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의 전 승조원들은 월급에서 5~10%씩 거두고 해군 가족들은 바자회를 개최하여 기금을 보태었다. 이렇게 모은 성금은 1만8천 달러였고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4만2천 달러를 보탰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6만 달러를 가지고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구입한 백두산함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8일 건조한 군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8년 5월 미 상선학교 연습함으로 이관되어 사용되던 비교적 신형 함정이었다. 우리 해군은 구입한 함정을 백두산함(PC-701)이라 이름을 지었다.

01. 박옥규 인수함장. 박옥규 함장을 포함한 인수요원들은 1949년 12월 26일 백두산함을 몰고 뉴욕 항을 출발, 하와이에서 함포를 탑재한 뒤 1950년 4월 10일 진해만에 도착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2. 백두산함 돛대(등록문화재 제463호).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의 돛대이다. ⓒ문화재청

미국에서 구입한 450톤 소형 군함을 태평양을 건너 한국 진해까지 몰고 오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갓 태동한 한국 해군에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당시 박옥규 인수함장을 비롯하여 진해 고등해원양성소 출신뿐이었다. 박옥규 함장은 1934 년에 선장 면허를 취득한 후 갑종 선장을 지낸 인재였다.

함장을 포함한 인수요원 15명은 모든 수리를 끝낸 뒤, 1949년 12월 26일 백두산함을 몰고 뉴욕 항을 출발, 파나마 운하를 경유하여 하와이진주만항에 입항했다. 하와이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함포를 탑재한 뒤 1950년 3월 20일 다시 항해에 올라 4월 10일 진해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을 물리치고 국가를 구한 수군 전통은 1895년 조선 수군이 해체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19세기 후반기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한 척의 전투함도 없어 속절없이 해군 강대국 군함들의 침략을 받아야 했고, 더구나 1905년에는 울산 근해에서 전함, 순양함, 구축함 등 첨단 대형 군함들로 무장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이기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기억이 생생한 상황에서 이제 우리도 전투함을 가졌다는 것은 실로 예사스런 일이 아니었다. 수군이 해체된 지 50년 만에 해군이 창설되고, 최초의 전투함을 보유하게 되었다니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민들은 해군 승조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백두산함의 장도를 축복했다.

03. 백두산함 돛대(등록문화재 제463호).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의 돛대이다. ⓒ문화재청 04.대한해협해전도. 1950년 6월 25일 백두산함(PC-701)이 대한해협에서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킨 대한해협 해전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전쟁의 결정적 위기, 북한군 침공을 막다

백두산함은 최초의 전투함답게 대한해협에서 부산항 부두시설을 파괴하려고 침투하던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북한 해군은 6월 25일 이전에 원산 등을 출발하여 옥계, 삼척, 임원 등지에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6월 25일 당일 새벽 5시경에 이미 묵호에서는 북한군이 상륙한 사실을 지서에 신고한 것으로 보아 전쟁 발발 2~3일 전에 북한 항을 출발하여 남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동해상을 초계하던 백두산함은 수상한 선박을 추적하라는 지시를 받고는 18시 38분에 부산 오륙도를 통과한 후, 20시 12분 검은 연기를 뿜는 의아한 선박을 발견했고 이후 4시간 동안 추적하여 6월 26일 새벽 0시 반에 이를 격침시켰다.

당시 북한 수송선에는 600명의 특수 게릴라 대원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부산항에 침투하여 부두시설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이들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부산항으로는 하역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후 전개된 한국전쟁의 양상은 실제와는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해협해전은 우리해군의 단독해상작전이었고 북한의 후방교란을 사전에 봉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해협해전은 백두산함만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소해정 YMS-512(고성정)과 소해정 YMS-508(구월산정)도 대한해협 해전에 참가하여 백두산함을 지원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백두산함은 이후 10여 년 간 동서남해안에서 해양수호 임무를 수행하다 1959년 7월 1일 퇴역했다. 지금이라면 해군창군정신과 해양수호정신의 상징이었던 백두산함 전체를 해상에 전시하여 기념관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1kg의 철도 아쉽던 시절이었다. 1966년 8월 백두산함의 돛대만 해사반도에 설치되었다. 광복 이후 해군 창설이 해군의 탄생이라면 백두산함의 보유 자체는 대한민국 해군이 세계 10위권 해군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발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이학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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