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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빔’속에 담는 심오한 정신, 미래의 전통이 될 새로운 시도. 화가 이인
작성일
2015-10-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142

‘빔’속에 담는 심오한 정신, 미래의 전통이 될 새로운 시도. 화가 이인. 그의 모든 작품은 미완성이다. 결론 없이 수많은 질문들로 가득 차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해묵은 질문에 천착해 30여 년 그림을 그려온 화가 이 인. 그는 전통 도상圖像과 색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인간의 시원, 현상 속의 본질에 닿기 위한 줄기찬 추적. 이인은 일상의 정서와 종교적 사유를 미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구도자처럼 숙연하게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인은 그러한 작업들을 묶어‘뿌리프로젝트’라 부른다. 01. 파주 헤이리마을, 볕이 가득 드는 작업실에서 만난 화가 이인. 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천착해 30여 년 그림을 그려왔다. ⓒ김병구

 

운명처럼 다가온 그림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는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아버지의 성향을 고스란히물려받았다. “어머니는 그냥 아낙이었는데 아버지는 좀 남다른 분이셨어요. 수염 기르시고 본인이 디자인한 한복을 입고 다니셨죠. 재야작가이긴 했지만 글씨 써서 서예전도 하시구요. 그런데 중학교 때쯤인가부터 그런 아버지가 싫더군요.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그런생활을 뒷받침할 만한 상황이 안 됐음에도 계속 도자기나 서예 같은 소외된 전통미술에 천착해서 늘 옷에 먹물을 묻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거예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훅 하고 가슴에 들어왔어요.” 마루에 걸려있던 대나무를 서각書刻한 아버지의 그림이 어느 날 문득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싫어했던 전통미술이 그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미술을 하고 싶다는 말을 차마 부모님께 꺼낼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인 채로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본격적으로 미대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곤 꼬박 10달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같이 학원에서 그림만 그렸다.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목표했던 동국대 미대에 진학한 뒤엔 그림이 점점 더 좋아졌다. “불교대학이니까 불화도 배우고 불교문화사나 인도철학 수업도 있었어요. 그때야 뭐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강의시간에 애들은 다 꾸벅꾸벅 조는데 전 그런 게 재밌더라구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는 끈은, 그와 미술 사이에도 억겁의 세월 전부터 이어져 있었나 보다. 배우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의욕이 넘쳐났다.

02. <검은 돌>. 캔버스에 혼합재료, 2012. ⓒ이인

 

소신과 탈피, 끊임없는 질문과 자유로운 시도

그는 교수들에게 ‘애물단지’ 같은 학생이었다. 열의도 있고 실력도 있는데 고상한 그림을 놔두고 저급한 그림을 그렸다. 교수들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발묵潑墨을 이용해 고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색채를 이용해 사실적인 대상을 그렸다. “민주화열기로 사회가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리기엔 현실사회가 너무 뜨거웠고, 전 인문적 소양이 부족했지만 동양화건 서양화건 미술은 현실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선비들의 고급 미술이 아니라 직업화가인 도화원이 그렸던 밑바닥 그림을 그리자, 현실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거였어요.” 화선지에 붓을 찍었을 때 먹이 번져나가는 스밈에만 기운이 있는게 아니라 세밀한 그림에도 초월적인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정은 소신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소신 속에 웅크리고 있 던 고집을 뽑아버린 뒤, 그는 오방색을 내려놓았고 재료라는 틀도 벗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가로서 무언가는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저도 허상이라는 걸 깨달은 뒤, 그는 재료에 대한 고집도 내려놓았다. 아크릴, 화선지, 캔버스, 광목천 등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작업을 한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형상과 추상, 평면과 입체의 제한도 없다. 과거의 전통미술이 근간이라면 현대의 전통미술은 과거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미술은 결국 작가의 내면세계를 평면 혹은 공간 안에서 형태와 색채로 표현하는 작업이죠. 그렇다면 모든 이분법적인 틀로부터 벗어나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는 거예요. 스스로 여러 제약을 만드는 건 무기를 한정해 놓는 것이나마 찬가지죠.” 언제까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보호되는 그림만 그릴순 없다. 백화점 같은 일반 건물 안일 수도 있고 거리일 수도 있다. 걸리는 공간이나 상황에 맞춰 다양한 작품이 필요하다. 그러니 굳이 가둘 필요도 없다. 재료를 다양하게 쓰니 그림 그리는게 더 재밌어졌다. 이제 마음 가는 대로 ‘좋은건 다’ 하면서 작업을 즐긴다.

“깊이가 없었다고 할까요. 예전엔 형상을 쫓아가고 기법을 쫓아갔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조선시대 민화에 나타나는 꽃의 모양, 선이나 색깔을 흉내 내려했었는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거죠. 도상이나 기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아래 흐르는 정신이 내가 붙잡아야 할 대상이죠. 그게 바로 ‘빔’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공’, 동양회화의 ‘여백’, 서양미술사에 나타나는 ‘미니멈’이에요. 빔을 통해 꽃을 그리고 돌을 그리고 사람도 그리죠.” 예술가가 가져야하는 자세는 소신만이 아니다. 틀을 깨려하지 않고 소신만 지키려 하면 결국 한계가 있다. 더 뻗어나갈 수 없다.

도상이나 기법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아래 흐르는 정신이 내가 붙잡아야할 대상이죠. 그게 바로 ‘빔’이에요. 03. 미술과 종교철학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의욕이 넘쳤던 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 주는 이인. ⓒ김병구

 

소통을 위한 콜라보레이션

8년 전, 그는 파주 헤이리마을에 새 작업실을 마련했다. 야트막한 동산 곁의 ‘마음등불’이라는 이름의 건물이다. 1층 사진 스튜디오 옆으로, 담쟁이덩굴 덮인 나무계단을 오르면 볕이 가득드는 그의 작업실이 있다. 양평에 원래 쓰던 작업실이 그대로 있는데도,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 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작업량이 늘어나고 작품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한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부분은 변화에 대한 강력한 욕구였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작품도 정체되기 마련이다. “봄가을엔 참좋은데 한여름 한겨울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그땐 양평에 가있죠. 또 어느 땐 산에 들어가 몇 달씩 절에 머물기도 하고 또 어느 땐 훌쩍 작업실을 떠나 국내외 답사를 하면서 드로잉 작업을 하기도 하죠. 전업작가는 발품을 팔아야 일을 할 수 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죠. 그림이란 것도 한 곳에서 계속 그리면 머물게 되어 있으니까요.” 삶과 작품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 작가 이인. 그는 일상에서도 닫혀 있기를 경계하고 열려 있고자 늘 자신을 관찰하고 일깨운다.

04. <동백>, 캔버스에 혼합재료, 2015. ⓒ이인

그리고 새로운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작가가 창작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감상자들과 만나는 방법에 있어서도 틀을 깨려는 시도다. 홍대 소극장에서 재즈 연주와 함께 즉석에서 수묵화를 그리는 퍼포먼스 공연도 하고,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현대인 얼굴을 한 천개의 동자상을 만드는 부조작품도 기획 중이다.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 뭘까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 미술 장르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장르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계속 시도해나갈 작정이다.

“김덕수 선생이 현대 디지털 음악가들과 협연하는 공연을 인상깊게 본 적이 있어요. 그분도 김수근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 지금과 같은 사물놀이를 새롭게 만들어낸 거라고 하더군요. 전통이 현대에 스며들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백년 전 것을 그대로 따르면, 백년 뒤에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하려는 일들은 현대적인 작업으로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 보자, 그런 거예요.” 예술은 옛 것에 새 것을 입혀야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랬듯이, 백년 뒤에 백년 전 화가 이인의 작업들도 전통으로 살아 숨 쉬길 기대한다.

05. 삶과 작품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 작가 이인. 그는 일상에서도 닫혀 있기를 경계하고 열려 있고자 늘 자신을 관찰하고 일깨운다. ⓒ김병구 06. 이인은 일상의 정서와 종교적 사유를 미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구도자처럼 숙연하게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병구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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