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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왕실 요리사, 숙수熟手
작성일
2015-09-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8287

숙수는 조선왕조에서 음식을 전문으로 만들던 자를 말한다. 현재의 조리사에 해당된다. 조리사가 역사적으로 대두된 시기는 중국 전설 속의 왕인황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술을 처음으로 만든 두강은 황제의 재 인宰人이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약 3700년 전 탕이라는 사람이 은왕조를 세웠다. 탕왕湯王옆에는 명재상 이윤伊尹이 있 어 탕왕을 도왔는데 그는 바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본미론』의 저자이면서 최고의 조리사였다.

01. 조선왕조의 수라상(반상차림). 수라상은 기본음식 외에 12가지 찬품이 올려지는 12첩반상을 원칙으로 하나 그 이상이어도 상관이 없다. ⓒ문화재청

 

은나라의 명재상, 조리사 이윤

이윤은 갓난아이 때 뽕밭에 버려졌는데, 그 지방 영주에 소속되어 있었던 조리사가 발견하여 양자로 삼아 요리를 가르쳤다. 이윤은 나이가 들자 조리사로 평생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당시 신흥 세력가였던 탕을 만나 거위구이를 정성껏 만들어 올렸다. 탕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이 되자 이윤은 대재상이 되었다. 그는 은왕 3대에 걸 쳐 재상이 되어 국가에 봉사했다. 약 3100년 전 은왕조가 망하고 주왕조가 들어선다. 주왕조의 첫째 왕인 무왕의 아우 주공이 만들었다는 『주례』는 조선왕조에서 통치의 지침서로 삼은 책이다. 첫머리에 인간은 보다 나은 곳에 살고 보다 좋은 것을 먹어 불로장수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하였다. 『 주례』에는 정부에 6관을 두고, 그 6관의 총괄자를 총재 宰라 했다. 이 총재직할에 궁중음식을 전담하는 선부膳夫가 있었고, 선부 밑에는 팽인烹人, 포인, 전사, 수인, 어 인, 별인, 석 인, 주인, 장인, 능인, 해인, 혜인, 염인 등을 두어 선부를 돕게 했다.

 

조선왕실의 전문 요리사

그럼 여기서 조선왕조로 돌아와 보자. 조선왕조에서는 성종16년(1485)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경국대전』이 조선왕조를 통치하는 기본 법전으로 준수되고 있었다. 『 경국대전』에 의하면 궁중음식을 맡아 운영하는 관청으로 사옹원을 두었는데, 사옹원의 총책임자는 정3품과 종3품직의 제거 2원員이었다. 제거 밑에는 종6품직의 재부宰夫1원, 종7품직의 선부膳夫1원, 종8품직의 조부調夫2원, 정9품직의 임부 夫2원, 종9품직의 팽부烹夫7원이 있었다. 재부는 지금의 주방장이고, 선부(반찬 담당), 조부(조리 담당), 임부(화열 담당), 팽부(끓이는 일 담당)는 일반 조리사들이다. 제거提擧와 마찬가지로 원員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보아 중인보다는 높은 대접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들이 소위 숙수들이다. 숙수들은 노자奴子들을 거느리고 조리에 임했다. 반감(음식물을 맡아 보던 자) 16구口, 별사옹(고기만을 다루는 자) 28구, 탕수색(물 끓이는 자) 26구, 상배색(밥상 차리는 자) 22구, 적색(생선 굽는 자) 18구, 반공(밥 짓는 자) 30구, 포장(두부 만드는 자) 10구, 주색(술 만드는 자) 12구, 다색(차 끓이는자) 10구, 병공(떡 만드는 자) 10구, 증색(음식을 찌는 자) 22구, 등촉색(불 밝히는 자) 10구, 성상(그릇 관리자) 56구, 수복(청소 담당자) 4구, 수공(물 깃는 자) 30구, 별감(잡무 종사자) 86구로 총 369구가 음식담당 노자들이다. 교대 근무로 출퇴근하였음으로 하루에 195명 이 근무한 셈이다. 각기 자기가 맡은 일만을 하는 자라 하여 각색장各色掌이라고도 하고, 특별한 일을 맡기고자 임시로 고용된 천구(천 인)라 해서 자비差備라고도 했다. 이들 자비 밑에는 자비들이 부리는 사환(조역이라고도 불렸음)이 적어도 자비 1명당 1명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예컨대 병공의 사환을 병모餠母라 했고 주색의 사환을 주모酒母라 했다. 숙수와 자비들의 성별은 남성들이었지만, 사환의 경우는 병모, 주모가 암시하듯이 여성을 고용한 경우도 있어 보인다. 물론 사환의 신분은 천인이었다.

『경국대전』을 근거로 한다면 자비 390명, 사환 390명을 합하여 780명 이 13명의 숙수 밑에서 근무하였다. 13명의 숙수들은 대전수라간, 왕비전수라간, 대왕대비전수라간, 문소전수라간, 다인청(내시들의 사는 공간), 세자궁수라간, 세자빈궁수라간에 적절히 배정되어 그 밑에 자비들과 사환들을 부렸지만, 중국에서 사신이 오거나 진연과 같은 나라에 커다란 행사가 있을 때에는 숙수들을 더 차출하여 임시 숙설소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사환을 제외한 숙수와 자비들은 각각 자기 소유의 전용 그릇들을 가지고 음식을 장만하였다. 행주치마를 차려입은 숙수들은 대체로 동해, 새옹, 유자, 안판, 말총체, 대체, 물통, 버들상자, 주칠반, 모판, 도기소라, 식도, 홍두깨, 사발, 솥, 수반, 대추숟가락, 싸리바구니, 백사발, 접 시, 보아, 완, 적꽂이, 주걱 등을 전용기용으로 삼았으며, 자비에서 주색을 예로 들어 보면 초엽잔, 란잔, 주홍수반, 유기주전자, 술 뜨는 유기복자, 사기술잔, 사기술병, 술잔, 청동식탁, 궤짝, 싸리바구니, 수건, 보자기, 바가지, 도기동이, 청동제 물뜨는 그릇, 토봉로가 전용기용이 되었다.

02. 조선 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1호). 주원(廚院), 소주방(燒廚房), 외주방(外廚房), 내주방(內廚房), 수라간(水剌間) 등 궁중 식생활을 관장하던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03. 고종의 전속 요리사인 안순환. 명월관, 태화관, 식도원을 차례로 설립하며 궁중요리를 상업화했다. ⓒ문화콘텐츠닷컴

 

궁중음식 대중화에 기여하다

임진왜란 이후 숙수와 자비들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 생겨났다. 대령숙수(임금의 지시나 명령을 기다리는 숙수로 집으로 퇴근하지 않고 소주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숙수), 조과숙수(떡과 한과를 취급하는 숙수), 주방숙수(소주방에서 근무하는 숙수) 등 숙수들의 주 업무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 파생하였다.

자비들도 두부 만드는 자를 포장이라 하였듯이 세면장(국수 만드는 자비), 상화병장(만두 만드는 자비), 죽장(죽 만드는 자비), 병장(떡 만드는 자비), 조병장(조과 만드는 자비) 등으로도 불렸다

오늘날 궁중 소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자를 모두 숙수라고 알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숙수는 원員의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인보다 높은 계층으로 분류되고 있던 남성들이었으며, 그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들은 1894년 11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왕실 사무를 국정에서 분리하고 왕실 조직을 개편하는 등의 개혁안인 갑오경장이 공포된 이후, 궁궐 밖으로 퇴출되었다. 퇴출된 이들은 명월관 등과 같은 조선식 요리집에 근무하면서 조선왕조궁중음식의 대중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다 쉽게 외식산업화하기 위하여 궁중음식을 왜곡 변질 시켜 보급함으로써 궁중음식의 질을 저하시키기도 했다.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글. 김상보 (前대전보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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