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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파극의 고전 <검사와 여선생>
작성일
2015-09-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814

신파극의 고전 <검사와 여선생> 2007년 9월 17일 등록문화재 제344호로 등록된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48)은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는 1940년대 무성영화이다. 이 필름은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무대극 레퍼토리를 활용한 통속극’이자 ‘신파극의 고전’이 며‘변사 연행 방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무성영화’라는 점에서 영화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해방 직후 서울 곳곳의 풍경 및 대중들의 인식과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사회, 문화사적인 사료 가치가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01. <검사와 여선생> 조선일보(1948년 3월 2일) 광고. ⓒ한국영상자료원

 

대중성을 겸비한 무대극 레퍼토리

해방 이후 무대 공연 및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신파물을 주로 공연하는 무대극과 노래를 곁들인 악극은 역사적 격변기와 가난을 경험한 대중들에게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였다. <검사와 여선생>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선생이 탈옥한 죄수를 돌봐주다 오해한 남편이 자신의 실수로 죽게 되자 살인죄로 법정에 서고 여선생이 소학교 재직 시절 돌봐주었던 가난한 학생이 검사가 되어 여선생의 무죄를 밝힌다는 내용이다. 1935년 단성사에서 '눈물의 여왕'이라 불리던 전옥이 출연해 크게 히트한 이래 신파 연극의 황금시대를 풍미했던 동양극장의 주요 공연 레퍼토리이자 해방 이후에는 극단 '청춘극장'에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영화공사 제1회 작품이자 윤대룡 감독의 데뷔 작품으로 <검사와 여선생>이 영화화된 것도 이러한 대중들의 인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화 <검사와 여선생>은 1948년 6월 우미관 개관 35주년 기 념 특별 작품이자 문교부 추천영화로 개봉된다. 이후 윤대룡 감독이 1958년에 다시 한 번 <검사와 여선생>을 연출하고 1966년에는 김지미가 출연한 <민검사와 여선생>(전범성)이 제작된다. <검사와 여선생>은 신파극의 고전으로 이 시기 신파는 대중들이 경험하는 사회경제 및 정치적 상황이라는 비극적 세계상과 운명에 대한 좌절, 패배감을 눈물로 집약 해소시키는 일종의 시대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통과 동정의 서사를 기반으로 한 인정극이자 법정물의 형태를 띤 신파극의 고전이자 원형으로 당대의 윤리 감각과 대중들의 공통 감각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사회문화사적 가치도 크다 할 수 있다.

02. <검사와 여선생> 자유신문(1948년 6월 5일) 광고. ⓒ한국영상자료원

 

변사 연행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무성 영화

윤대룡 감독은 <검사와 여선생>을 영화로 만들고자 자신의 변사 스승이자 원작자인 김춘광을 찾아가 허락을 구한다. 식민지시대 인기 변사 출신이기도 한 김춘광은 이를 수락한 후 이 작품의 변사를 맡아 전국을 누비며 관객들을 눈물바다로 만든다. 이 작품에 있어 가장 주목할 인물은 바로 원작자 김춘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춘광은 식민지 시대를 풍미했던 변사이자 희곡작가였다. 무성영화의 변사로 인기를 끌자 1923년 극영화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 변사는 소리가 없던 영화에 주인공들의 대사를 전달하고 해설을 담당하던 종합 엔터테이너이자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인기 변사들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제작에 관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변사 시절 김춘광은 김조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며 변사로 이름을 떨치자 우미관의 일본인 주인이 그를 주임 변사로 초빙하였으며 이후에는 조선극장을 인수하여 변사 활동을 이어나갔다. 1935년에는 극단 예원좌를 조직하여 수많은 작품을 썼으며 해방이 되자 극단 청춘극장을 조직하고 국도극장 부사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김춘광은 대중극을 선호하였으며 주로 사랑과 의리, 인정극을 주제로 삼았다. <검사와 여선생>, <촌색시>, <어머니와 아들>, <안중근사기>, <눈물의 진주탑> 등 역사극과 현대극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신파적이며 통속적인 내용으로 관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김춘광의 작품은 연극으로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영화화도 자주 되는데 <검사와 여선생>도 그러한 맥락 속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무성영화의 시대는 무대극 속에 영화를 삽입하여 일부 상영하던 연쇄극(키노드라마)을 제외하고 극영화가 처음으로 제작된 1923년부터 대략적으로 발성영화(유성영화)가 처음으로 제작된 1935년 <춘향전> 이전까지로 본다. 발성영화 제작이 일반화된 가운데 해방 이후 무성영화가 제작된 것은 이례적인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 일본이 물러가고 영화 제작 환경이 열악해지자 식민지시대에 제작된 영화들을 재상영하거나 연쇄극, 16mm 무성영화 등을 제작한 관행들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은 전국을 누비며 인기를 끌었으며 변사의 연행은 무성영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49년 6월 김춘광이 뇌염으로 사망한 뒤에는 윤대룡 감독의 변사 후배이기도 한 신출이 필름을 인계받아 지방 흥행을 하다 영화진흥공사 필름보관소(한국영상자료원의 전신)에 기증해 현재까지 영상자료원에서 보관되고 있다.

03. 04. <검사와 여선생>의 한 장면. 여선생이 탈옥한 죄수를 돌봐주다 오해한 남편이 자신의 실수로 죽게 되자 살인죄로 법정에 서고 여선생이 소학교 재직 시절 돌봐주었던 가난한 학생이 검사가 되어 여선생의 무죄를 밝힌다는 내용이다. ⓒ한국영상자료원 05. 무성영화 마지막 변사(辯士) 신출 씨가 2010년 4월 28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추억의 영화보기’에 출연, <검사와 여선생> 변사 진행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콘텐츠

 

1940년대 후반 도시 풍경을 담은 영상 기록물

<검사와 여선생>은 영화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1940년대 후반 도시 풍경을 영상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영상 기록적 가치가 뛰어나다 할 수 있다. 최근 한국 고전영화에 대해 영화미학적 가치로 평가하기보다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국의 도시 풍경 및 풍속 등을 연구하는 역사학, 문화인류학, 건축학 등 다방면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검사와 여선생>에서는 1948년 서울의 전차, 철도, 골목, 책방, 법정 등의 모습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억과 역사, 시대를 증언하는 문화재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 박혜영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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