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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승업, 틀을 깬 자유분방한 사유의 세계
작성일
2015-07-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1880

장승업, 틀을 깬 자유분방한 사유의 세계.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창성과 창조성이다. 이런 특징은 작가마다 다르게 표출되는데 그 세계는 고정관념과 기존의 틀을 벗어났을 때 도달할 수 있다. 장승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기량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작가다. 대담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 예술에서 중요한 독창성과 창조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 기량 최고의 작가 장승업의 [호취도豪鷲圖]

매 두 마리가 심하게 뒤틀린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매가 걸터앉은 고목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뎌낸 듯 껍질이 두껍고 거칠거칠하다. 봉황은 벽오동에만 깃들이 듯, 매는 고목에 앉아야 제격이다. 호방한 붓놀림을 드러내기에는 어린 나무보다 고목이 어울린다. 생각에 앞서 재주가 먼저 붓을 움직인 것일까.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붓을 들자마자 고목과 바위, 매 등을 순식간에 그렸다. 필치에 속도감이 느껴진다. 일필휘지一筆揮之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치 자신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일시에 쏟아낸 듯 순식간에 완성한 작품 같다. 붓을 들어 완성하기까지 전혀 멈추지 않고 붓질을 계속했으리라.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주만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도를 잡고 소재를 배치하고 붓질을 결정하는데 긴 시간이 할애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매의 깃털 하나하나에서부터 바위와 나무를 표현하기까지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다. 억세고 날카로운 매의 이미지는 몰골법沒骨法과 담채淡彩의 바탕 위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매의 민첩함과 강한 기운을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색을 절제했다. 현란한 색으로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보다 매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마리 매의 자세가 다르듯 매가 앉은 나뭇가지도 다르다. 위쪽 가지에 앉은 매는 당장에라도 먹잇감을 향해 날개를 펼칠 듯 온 몸에 긴장감이 팽팽하다. 나뭇가지도 매의 몸짓을 닮아 각이 심하게 꺾였다. 아래쪽 가지에 앉은 매는 한 발을 든 채 주변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린다. 나뭇가지도 매처럼 편안하게 뻗어있다. 화면에 놓인 모든 구성 요소들이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분란하게 조화를 이룬다.

01. 장승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호취도(豪鷲圖)>. 장승업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답습하는 대신 자신만의 필치로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현재는 세 곳에 각각 소장되어 있으나 원래는 네 폭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01-1. <호취도> ⓒ삼성리움미술관 01-2. <쌍치도(꿩과 메추라기)>. ⓒ삼성리움미술관 01-3. <유묘도(고양이)>.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01-4. <삼준도(말)>. ⓒ일본 유현재

 

보편성과 전통성 위에 개성을 얹었다

[호취도]는 장승업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명나라의 궁정화가 임량(林良, 약1416~1480)과 장승업의 선배격인 유숙(劉淑, 1827~1873)의 매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전통에 정통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평가하듯 일자무식인 그가 어쩌다 운이 좋아 재주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수많은 명화들을 보고 배우면서 결코 대가들의 이름에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기량과 개성을 충분히 살릴 줄 알았다. 그는 임량과 유숙의 매를 참고하되 온전히 자신만의 매를 창조했다. 임량의 매는 지나치게 먹을 많이 사용해 화면에서 받는 느낌이 무겁다. 반면 장승업의 매는 상쾌하다. 유숙의 매는 ‘참새를 겨냥하는 매’의 전통을 비판 없 이 계승했다. 장승업은 그 전통에서 과감히 탈피해 ‘두 마리 매’를 그렸다. 전통을 계승하되 자기식의 해석으로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것이 [호취도]가 유숙과 임량의 매를 넘어 매 그림의 꼭대기에 걸릴 수 있는 이유다. [호취도](삼성리움미술관 소장)는 [쌍치도]와 대련을 이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유묘도](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와 [삼준도](일본 유현재 소장)등 네 폭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지금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 안타깝다.

장승업 작품의 바탕에는 전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자리한다. 그는 주문에 의해 그림을 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산수, 인물, 영모, 기명절지 등 다양한 화목을모두 소화해냈다. 그의 그림에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가 담겨 있다. 유독 그의 작품 중에 신선도神仙圖와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가 많은 이유도 외세의 침략으로 불안했던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운전통 위에 주문자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림을 풀어내는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었다. 거침없다. 그는 자신의 호방한 필력을 마음껏 펼 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장승업의 위대한 점이다.

02. <죽원양계>. 장승업은 당시 중국 상해에서 유행하던 상해파(上海派) 화풍을 받아들여 화사하 면서도 장식적인 화조화를 그렸다. 전통성과 더불어 국제적인 화풍에도 적극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장승업

장승업은 출신성분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신분이 낮았다는 뜻이다. 신분이 낮았으니 높은 감투가 주어질리 만무했다. 학연이나 지연 같은 인맥도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승업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강고한 벽 같은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했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이 워낙 강렬해 후원자가 생겼다. 그의 재능을 아낀 사람들의 도움으로 궁궐에 들어가 왕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무명의 화가가 청와대에 입성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대박을 터트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성이 얽매인 것을 싫어한 그는 궁궐이라는 답답한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명성을 얻자마자 자신이 만든 고정된 틀에 스스로를 가두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작가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궁궐에 갇혀 고관대작들의 요구에 따라 붓질하는 장승업의 모습은 그가 갈길이 아니었다. 새장에 갇힌 매는 야생성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장승업은 궁궐에서 뛰쳐나왔다. 그날 이후 오직 자신의 붓이 시키는 대로만 살았다. 주문에 의한 그림을 그리되 주문자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만의 화도畫道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은 주문자의 요구에 의해 선이 누그러지지도 않았고 힘을 잃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에서 한결같이 제어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만약 주문자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다면 [호취도]같은 역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흔히 뛰어난 예술가를 평가할 때 오해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를 무조건 천재로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 식이다. 장승업도 타고난 천재였을까. 그가 그린 [죽원양계(대나무와 닭)]를 보면 그런 편견을 거두게 된다. [죽원양계]는 매우 현대적이고 신선한 작품이다. 닭은 벽사의 의미를 지녔으니 장승업 이전에도 많은 작가들이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 어떤 닭 그림보다 파격적이다. 화사하고 장식적이다. 이것은 그가 당시 중국 상해에서 유행하던 상해파上海派화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상해는 급속도로 성장한 부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화가들은 새로 부상한 신도시의 활기찬 분위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감각의 그림을 제작했다. 장승업은 상해파의 화풍을 받아들여 대중적이면서도 밝은 화조화를 그렸다. 전통성과 더불어 국제적인 화풍에도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선도와 고사인물도를 그린 손으로 상해파 화풍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새로운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감 없이는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였다. 전통성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용기 말이다.

국제성과 현대성을 담으려는 노력은 화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참고한 화보는 이미 오래전 조선에 유입된 『고씨화보顧氏畵譜』를 비롯하여 당시 새롭게 선보인 최신식 화보인 『시중화詩中畵』에 이르기까지 수용 범위가 넓다.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스님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서울대박물관 소장)는 『고씨화보』를 참조했다. 세 명의 신선이 나이 자랑을 하는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간송미술관 소장)와 왕희지가 거위를 보고 있는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개인 소장)는 『시중화』에서 그 인물을 취했다. 그는 청나라에서 유행한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를 처음으로 시도해 유행시킨 화가였다.

03. <홍백매10폭병풍>. 장승업이 사군자만을 단독으로 그린 유일한 그림이다. 농묵과 담묵을 풀어 매화 두 그루의 몸체만을 열폭 병풍에 화려하게 수놓았다. 하나의 주제를 병풍의 전체 화면에 그린 형식은 유숙과 허련의 선례가 있으나 그들의 작품에 비해 압도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삼성리움미술관

 

호방함 속에 감추어진 치밀함

장승업의 작품은 자유분방하다고 평가받는다. 자유분방함의 사전적 의미는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행동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장승업은 자신의 호를 오원吾園이라 했다. 단원檀園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지었다. 그만큼 자의식이 강하고 자부심이 컸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절제되어 있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에너지를 조절하기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돈도 명예도 심지어는 가정까지도 무관심한 채 오로지 그림 하나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 장승업. 그는 수많은 인생 역경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화가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갔다. 당당하게 걸어갔다.

장승업의 작품은 힘이 넘친다. 몇 번의 붓질 속에 가둬둘 수 없을 정도로 호방하다. 그러나 장승업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가슴속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한 붓놀림조차도 사실은 거듭된 연습과 철저한 준비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오직 타고난 재주만으로 아무렇게나 그의 기량을 뽐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장승업은 하늘이 내린 천재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은 천재성에 있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는 반면 그는 자신의 재주를 스스로 아껴 그림으로 풀어낼 줄 알았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으로 그림 세계를 열어간 장승업의 자세는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를 생각하는 나약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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