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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타락한 과거科擧의 사생아들 - 선접꾼과 거벽, 사수
작성일
2015-07-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1202

타락한 과거科擧의 사생아들 선접꾼과 거벽, 사수. 모든 조선 양반의 꿈은 과거 급제, 그중에서도 대과라 불리는 문과 급제였다. 그래야 관료로 출세하고, 집안을 빛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정 기 과거시험(식년시)의 대과 급제 인원은 고작 33명뿐. 증광시, 알성시, 춘당대시에다 북도과, 서도과 등의 외방별시를 합쳐도 수십 만 지원자에 비하면 합격자는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그리하여 초기부터 각종 부정행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더니,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사회가 문란해지자 부정행위는 과거시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급기야는 부정행위 전문가들이 분야별로 등장해 하나의 직업군(? )을 이루는 지경에 이르렀다.

01. 김홍도의『화첩평생도』중 <소과응시>. 과거 시험장의 어수선한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곳곳에 응시생을 도와주고 있는 정체 미상의 사람들이 포착된다. 대신 답안을 작성해 주거나 답안을 베껴 써주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국립중앙박물관

 

부정이 일상으로, 조선 후기 과거 풍경

먼저 19세기에 그려진 [소과응시]라는 그림을 보자. 소과小科는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으로 대과의 예비고사에 해당하는 과거시험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림 속 풍경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여느 시험장과는 사뭇 딴판이다. 커다란 우산 아래 대여섯명이 무리를 지어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과거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는 책 보따리도 보인다. 아니, 과거시험이 원래 ‘모둠별 오픈북’방식이었던가? 물론 그럴 리 없다. 과거 시험장이 이리 된 까닭은 초창기부터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던 부정행위가 양란을 거치면서 일상이 되어버린 탓이다. 이 시기 부정행위의 가장 큰 특징은 ‘팀’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를 접接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시험장에서 좋은 자리를 확보하는 선접先接꾼, 답안 문구를 작성하는 거 벽巨擘, 이걸 깔끔하게 답안지로 옮기는 사수寫手, 그리고 시험 당사자인 거자擧子등이 포함되었다. 여기에다 이들을 시중 드는 노비와 술을 파는 장사치까지 어우러져 과거 시험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시골 오일장보다 더 시끌벅적한 곳이 되어 버렸다.

 

부정행위의 선봉장, 선접꾼

과거는 ‘선착순 입장’이었으므로 일찍 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과거 응시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 이유가 있다. 33명 합격에 10만 명 이상 응시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시험문제가 걸리는 곳에 가까운 자리,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자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시험문제에서 먼 자리는 가까이 와 문제를 적어가는 동안 시간이 다 가버렸으니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이었다. 단 며칠 만에(때로는 하루 만에) 수만 장의 답안지를 일일이 채점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대부분의 합격자들이 처음 낸 답안지 수백 장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등장한 사람이 몸싸움을 통해 좋은 자리를 맡는 선접꾼이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전문 직업인(?)이었을 리는 없다. 처음에는 집안의 노비 중에서 힘깨나 쓰는 자가 선접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싸움이 점점 치열해지고 심하면 죽어나가는 사람까지 생기면서 외부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일이 흔해졌다. 결국 과거철이되면 지방의 주먹들까지 대거 상경해 돈푼깨나 있는 집안의 선접꾼으로 지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돈 대신 자신들의 답안지 대리 작성을 보수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선접꾼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02. 홍패. 국가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발급한 급제 증서이다. ⓒ국립민속박물관 03. 김성일 종가 고문서 (보물 제906호) 중 교첩 및 교지.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관작·자격·시호·토지·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문화재청

 

부정행위의 머리와 손, 거벽과 사수

거벽이란 요즘으로 치면 족집게 과외선생과 닮았다. 지금과 다른점이라면 조선의 거벽은 대리시험까지 치러준다는 것. 거자가 적어 온 과거 시험문제를 보고 모범답안을 작성하는 것 이 거벽의 일이었다. 거벽이 작성한 모범답안을 깨끗하게 정서하는 것 이 사수의 몫이었고.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 하나. 사수는 그렇다 치고, 거벽은 왜 스스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을까?

과거의 부정을 누가 저질렀는가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상화된 부정행위를 통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권문세가의 자손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출세는 남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가난한 양반이나 애초에 출세가 막혀있던 서얼 출신의 경우에는 과거 급제보다 거벽으로 돈을 버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조선 후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 이 지금처럼 힘들었던 모양이다.

 

※ 참고문헌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푸른역사, 2003
『조선직업실록』, 정명섭, 북로드, 2014

 

글. 구완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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