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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작성일
2015-06-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6003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건물 하나만 남긴 채 폐허로 변해버린 평양과 달리 아직까지 조선 500여 년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광화문 일대는 어떻게 보존된 것일까? 그것은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전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용기 있는 마음 덕분이다.

 

임진왜란 발발… 시골선비들 조선왕조실록을 구하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아침 8시경. 왜선 7백여 척에 탄 조선침략 선봉군 제1진 1만 8,700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왜군은 북상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한양의 궁궐에 있는 춘추관, 충주, 성주에 보관하던『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탔다.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고려사』, 『고려사절요』등 모두 1,34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또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

01. 02. 전주 경기전과 태조 어진. 태조의 어진은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 걸 려 있었던 것으로, 임진왜란 때 4대 사고가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전주사고만 화를 면했다. ⓒ문화재청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실록과 어진을 산속 깊숙한곳으로 옮기려면 말20여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한데……” 그의 머릿속에 이 지역사회에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전라도 태인에 사는 유생 손홍록이 떠올랐다. 바로 달려가 간청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실록을 보관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친구 안의와 함께 하인 30여 명, 수십 마리의 말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갔다. 이때 손홍록의 나이는 58세, 안의의 나이는 64세로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오희길은 실록을 숨길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 세 사람은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3대에 이르는 180년의 기록을 47개 상자에, 『 고려사』등 다른서책을 15개 상자에 담아 수십개의 수레에 싣고 전주를 떠났다. 은봉암에 도착한 것은 이레만인 1592년 6월 22일. 다음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용굴암으로, 다음달 14일에는 실록을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은 책들을 일일이 지게에 지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은사(현 내장사)의 희묵스님과 무사 김홍무, 이름 없는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나선 100여 명과 함께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실록과 어진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보관했던 기간은 14개월에 달한다. 후일 안의가 쓴 『난중일기초』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을 지킨 날이 53일, 안의가 혼자 지킨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있는 날이 143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03.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1군단에게 작전지역 안에 있는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에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만 남고 폐허로 변했다. ⓒ문화재청 04.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한국전쟁 당시 한암스님은 상원사에 불을 지르려는 군인들을 목숨을 걸고 막아냈다. ⓒ문화재청

 

잿더미로 변한 월정사… 큰스님이 몸으로 지킨 상원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의 강원도.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 산속에 있는 민가나 절이 적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없애려는 가혹한 조치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의 스님과 신도들은 북한군이나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국군이 태우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절 건물의 방구들을 파내고 모든 문짝을 뜯어냈다. 마침내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천년고찰을 제 손으로 태우려니 부담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들을 시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월정사는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만 남고 폐허로 변했다.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오대산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가고,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는 한암스님만 상원사에 남아 있었다. 상원사로 들어온 군인들은 법당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주게”라고 이르고는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뒤 법당 안에있는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를 본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나오세요”라며 끌어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 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불을 태운 뒤 떠났다. 상원사는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을 보관하고 있었다.

05. 『 고려사(부산광역시시도유형문화재제104호)』.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에는『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를 비롯해 모두 1,34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문화재청

 

“화엄사를 불에 태워라”,“문짝만 소각하라”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 주축부대인 남부군을 토벌하던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고민에 빠졌다.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곡사 등 인근 사찰들은 모두 공비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불길에 휩싸였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전쟁 중이라지만 화엄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더구나 각황전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차일혁은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화엄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들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절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한 것 이다” 이로써 화엄사 전각들은 무사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06. 차일혁 총경의 공적비. 빨치산 전투 당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차일혁 총경은 화엄사 문짝만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했다. ⓒ후암 미래연구소 07. 김영환 공군 편대장.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이 전해졌지만 해인사 뒷산 너머에 폭탄을 떨어뜨려 해인사를 살려냈다. ⓒ대한민국 공군

 

“해인사를 폭격하라”, “해인사 주변에만 기관총을 갈겨라”

1951년 12월, 지리산 일대에는 한창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환 편대장이 지휘하는 한국 공군의 유일한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는 공비토벌작전에 항공지원을 맡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전투비행대에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4대의 비행기가 사천비행장을 출발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마다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와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50 기관총 1,800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미군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해인사 마당에 떨어져 하얀 연막을 내고 있었다. 이때 김영환 편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각기는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지시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잠시후 정찰기에서 독촉훈령이 내려왔다.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 도대체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편대장의2차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폭탄 공격을 하지 말라!” 4대의 비행기는 해인사를 지나쳐 뒷산 능선 너머에서 폭탄과 로케트탄을 빨치산들에게 퍼부었다. 천년고찰을 지키려는 김영환 편대장의 용기가 해인사를 살린 것이다.

08. 덕수궁(사적 제124호). 한국전쟁 당시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인민군이 모두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을 개시해 덕수궁이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문화재청

 

“전쟁 중이라도 한 나라의 궁궐을 훼손할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수복작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 육군의 제임스해밀턴 딜 중위는 인민군이 주둔해 있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밀턴 중위는 명령을 어기고 인민군이 모두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을 개시해 덕수궁을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울시내에는 중요한 건물이 많이 있었다. 역사적 건물로 알려진, 한국의 지난날 왕의 궁전으로 사용된 고궁이 몇 곳 있는데, 그중 서남쪽에 있는 것이 ‘덕수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나는 틀림없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그 장비를 순식간에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고궁도 함께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 국가의 유물인데, 나의 ‘포격 개시’란 말 한마디로 불과 몇분 안에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처리하여 포격하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제임스 해밀턴딜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KORE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본래 ‘나라의 운을 기리는 곳’이라는 의미의 경운궁이라 불렸던 덕수궁은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도 한 미국 장교의 문화유산 보호 정신 덕분에 지금까지 이 자리에 남아 현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시골유생들이 가산을 털어 나서지 않았다면, 큰스님이 상원사에 없었다면, 차일혁과 김영환 두 분이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면,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까지도 소중히 여긴 해밀턴 딜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글. 임기상 (CBS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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