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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과 싸우기 위해 태어난 멸화군
작성일
2015-06-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1286

불과 싸우기 위해 태어난 멸화군. 경복궁 근정전에 가면 월대의 모서리에 커다란 청동 항아리가 놓인 걸 볼 수 있다.‘드므’라고 불리는 이 항아리는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드므에 있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치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을 두려워하고 섬기다

조선시대 여염집의 아낙네들은 부뚜막에 불을 관장하는 조왕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나쁜 말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뚜막을 발로 밟거나 걸터앉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새로 떠온 물을 그릇에 담아 부뚜막의 토대 위에 올려놨다. 아울러 새해와 명절이 되면 간단한 음식을 차려서 조왕신에게 바쳤다. 궁궐의 드므가 불을 두려워하는 증거였다면 조왕신은 숭배를상징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일상생활에 불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려준다. 밥을 짓고 난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이 필요했지만 반대로 이 불이 크게 번질 경우 목숨과 재산을 잃게된다. 특히 조선시대 건축물은 나무와 짚,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에 극히 취약했다. 멸화군은 이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불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이었다.

01. 조선시대 소방 수레인 완용펌프. 구한말 궁내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자 궁중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동산도기박물관

 

화마 속에서 태어나다

세종 8년, 서기로는 1426년 2월 15일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아궁이의 불씨가 밖으로 탈출하면서 불이 시작되었다. 한양은 삽시간에 화마에 휩싸였고, 전체 면적의 약 20%가 잿더미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음날에도 불이 나서 수백 채의 집과 관청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때마침 한양 밖에 있던 세종대왕은 보고를 받는 즉시 돌아왔다. 그리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웠다. 건물들이 밀집한 도시는 화재에 취약했으며 나무와 짚으로 만들어진 한옥들은 불에 쉽게 타곤 했다. 조선의 도읍이자 대도시였던 한양 역시 이런 화재에 극히 취약했다.

02. 궁궐의 전각 모서리에 놓인 드므. 화마를 쫓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정명섭 03. 완용펌프 중 물이 분사되는 부분. 완용펌프는 경종 3년(1723)에 ‘수총기’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이후 보완작업을 거 쳐 ‘완용펌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연합콘텐츠

 

사실 이 날의 화재 이전에도 조선은 나름대로의 화재 대책을 강구했다. 태종 때에는 화재를 감시할 담당자를 지정해서 위험지역을 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세종대왕 역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규칙인 금화조건을 반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는 화재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진압할 수 없다고 느낀 세종대왕은 전담관청을 설치할 것을 결심한다. 같은 달에 창설된 금화도감禁火都監은 화재 예방과 진압을 전담하는 최초의 관청이었다. 병조소속이었지만 주 임무가 한성부의 화재를 막는 것이기 때문에 한성부판사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5년 후인 1431년에는 최초의 소방대라고 할 수 있는 금화군이 만들어졌다. 비록 상설조직이 아니라 한성부의 군인과 노비들 중에서 불을 끄는 임무를 맡은 이들을 편성한 비상대기조에 가깝긴 하지만 이전 보다는 효율적인 화재 진압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금화도감의 설치가 나름 효과를 봤다는 것을 의미한다.

04. 서울 소방학교에서 조선시대 1890년 궁정 소방대의 복장을 갖춘 소방관들이 근대 소방 유물인 완용펌프를 사용해 소화시범을 보이고 있다. ⓒ연합콘텐츠

이렇게 화마 속에서 태어난 금화군은 세조 때인 1467년 멸화군으로 확대된다. 50명의 군인들로 편성된 멸화군은 도끼와 쇠갈고리, 밧줄 등을 장비한 채 화재 현장에 출동해서 불을 껐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순찰을 돌면서 화재를 예방했고, 야간에는 종루위에 올라가서 감시했다. 지금과는 달리 운종가에 있던 종루는 2층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위에 올라가면 한양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멸화군은 불이 나면 물을 나르는 급수비자와 함께 현장으로 출동해서 화재를 진압했다. 소방차와 호스가 없던 시절이라 어떤식으로 화재를 진압했는지 다들 궁금해 한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있는 소방역사박물관에 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멸화군의 임무는 화재 진압이 아니라 화재가 더 이상 번지는 걸 막는것이다. 멸화군이 가진 도끼와 쇠갈고리는 불이 붙은 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요했다. 만약 불이 심하게 번진 상태가 아니라면 못 쓰는 휘장과 깃발로 만든 보자기와 장대 끝에 물에 적신 천을 매단 멸화자를 이용해서 불을 껐다. 멸화군은 이 밖에도 화재예방 및 감시활동도 펼쳤다. 한양에는 경수소라고 불리는 일종의 파출소가 있고 이곳에 순관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야간 통행금지를 단속했다. 멸화군들도 함께 다니면서 화재를 감시하는 등 화재 예방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멸화군의 활동으로 화재가 일어나지 않은 탓인지 이후 규모가 축소되고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었다. 그러다 인조 때인 163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한말이 되면서 서구의 소방장비가 들어오면서 금화도감과 멸화군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소방행정사』내무부, 행정자치부, 1989.

『조선직업실록』정명 섭, 북로드, 2014.

 

글. 정명섭 (역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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