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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가 나와 세상을 구원하리라
작성일
2015-06-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923

이야기가 나와 세상을 구원하리라. 이란 전통 극예술 나칼리. 2013년 KBS 다큐 프로그램 <파노라마>는 신라와 페르시아의 교류를 보여주는 이란 서사시 <쿠쉬나메>를 조명한 동명의 다큐 2부작을 선보였다. 이란 현재 취재와 더불어 당시 페르시아와 중국, 신라를 상상해 재현한 애니메이션, 양국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과 쿠쉬나메 원본, 양국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교차 편집해 만든 이 다큐물은 21세기에 세상에 드러난 쿠쉬나메의 가치와 의의를 묵직하게 때론 서정적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다큐 중간 쿠쉬나메를 소개하는 방식이 독특했다. 평범한 성우의 나레이션으로 처리하지 않고 이란의 어느 식당 무대 위 하얀 노인을 비추었다. 하얀 머리칼의 노인은 지팡이로 탁 소리를 내며 관객들을 주목시키고, 분명한 발음과 힘 있는 목소리, 특유의 몸짓으로 <쿠쉬나메>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01. 02. 나칼리의 구연자, 즉 나칼은 운문이나 산문의 형식으로 특유의 동작과 몸짓, 때로는 음악과 그림이 그려진 천막을 사용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네스코(UNESCO)

 

페르시아의 가장 오래된 전통 극예술, 나칼리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나칼리naqali는 이란, 즉 페르시아의 가장 오래된 전통 극예술이다. 나칼리를 구연하는 구연자, 나칼은 운문이나 산문의 형식으로 특유의 동작과 몸짓, 때로는 음악과 그림이 그려진 천막을 사용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칼리는 목소리와 몸짓 등 한정된 도구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나칼은 당대의 문화적 표현과, 언어, 방언, 전통 음악 전반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특별한 능력, 이를테면 긴 이야기를 잊지 않는 기억력, 관객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올 수 있는 즉흥연기 기술까지 요구된다. 보통 나칼은 이야기에 방해되지 않는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입지만 전쟁 장면을 들려줄 때는 전통 모자나 갑옷을 입기도 한다. 나칼리는 주로 커피하우스, 유목민들의 텐트, 집안, 대상인들의 숙소 같은 곳에서 공연되곤 했다.

 

이야기의 땅, 이란

다양한 시청각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즐비한 21세기, 나칼리라는 전통 극예술이 이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물음표가 생기는 지점이다. 어떻게 이란에선 전통 극예술이 살아남았던 걸까? 그리고 왜 이것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걸까?

지금의 이란, 먼 옛날의 페르시아는 이야기의 땅이었다. 독일 대문호 괴테는 존경하는 페르시아의 시인 허페즈를 찬양해 바친 그의 책『서동시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페르시아 민족은)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동화와 한량없는 시가 있다.’ 괴테가 말했듯 페르시아는 이야기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중 하나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시대, 왕의 명령은 이야기를 통해 제국 곳곳에 전달되었다. 예능인들은 하프를 연주하며 왕의 칙명을 이야기에 녹여 사람들에게 전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아 더 효과적으로 왕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12세기 네자미, 13세기 루미 같은 페르시아 시인들 역시시에 다양한 우화를 담았고,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카펫, 벽화, 세밀화, 수공예품 등에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더불어 페르시아는『천일야화』를 탄생시킨 땅이기도 하다. 『천일야화』는 보통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져 있지만, 원조는 6세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천의 이야기>이다. <천의 이야기>가 <아라비안나이트>가 된 것은 아랍 침략 후인 8세기 아랍어로 번역되어 바그다드, 카이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추가되고,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천일야화』의 나칼, 즉 이야기꾼인 셰헤라자드는 왕비의 간음을 목격한 뒤 배신감과 분노로 매일 밤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죽이는 폭군 샤흐리야르 왕을 다양한 이야기로 치유한다. 이야기가 지루하면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에 밤마다 왕의 곁에서 사랑, 범죄, 여행, 신선, 역사, 교훈담, 우화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왕은 그녀의 이야기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왕은 매일 밤 이렇게 되뇐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알라께 맹세코 이 여자를 죽이지 않으리라.’

03. 토라비가 샤흐나메를 가지고 나칼리를 하는 모습. ⓒ유네스코(UNESCO)

 

21세기 판 셰헤라자드, 여성 나칼 훠테메 하비비저드

시간을 거슬러 페르시아에 셰헤라자드가 다시 돌아온걸까? 간신히 살아남은 나칼리 예술에 단비같은 존재가 등장했다. 그녀의 이름은 훠테메 하비비저드Fatemeh Habibizad. 본명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여주인공 이름인 고르다파리드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가장 주목받는 나칼인 동시에 금기를 깬 나칼이다(이란에서 여성은 나칼이 되기 힘들다). 대학에서 박물관학을 전공한 그녀는 이란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이동식 박물관(mobile museum)’을 구상하던 중 나칼리를 처음 알게 됐다. 그녀는 나칼리가 가장 완벽한 구비문학임을 깨닫고 그녀가 아는 극장 매니저에게 청해 당대 가장 유명한 나칼인 토라비를 소개 받게 된다. 그 후 토라비의 가르침으로 나칼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지만, 목소리와 동작만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 나칼이 되는 건 엄청난 학습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나칼은 단순히 읽는 데에서 나아가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구술 기술, 소설, 신화, 서사시 등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는 연습으로 들려줄 이야기를 장악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녀는 집 안 카펫 위에 두꺼운 책과 문서, 신문 등을 펼쳐놓고 앉아 이야기의 얼개와 몸짓, 소리 내는 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연습을 해야 하는 탓에, 그녀는 집이 아닌 테헤란 교외의 다리 밑이나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연습을 했다. 이렇게 각고의 연습 끝에 탄생한 그녀의 나칼리는 극장 무대 위, 도시 광장 무대 위에서 공연 된다. 그녀의 본명보다 더 유명한 고르다파리드는 이란서사시 <샤흐나메>에 나오는 용감한 여인. 고르다파리드의 전쟁 장면을 표현할 땐 마임으로 머리카락을 끌어 모아 투구를 쓰고 성채를 나와 적을 향해 달려간다. 팔을 돌려 줄을 돌리고 입으로 획획 줄 감는 소리를 흉내 낸다. 고르다파리드로 변한 그녀의 목소리에선 이런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이란과 투란의 전쟁 중에 소흐럽이 적을 이끌고 이란 국경 하얀 성에 도착했을 때, 어떤 남자도 소흐럽과 감히 상대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중략) 그녀의 장밋빛 뺨은 분노에 찬 복숭아처럼 검게 변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헬멧 안에 넣고 요새밖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이름은 고르다파리드, 그녀와 같은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화려한 시청각 예술의 급증, 나칼리의 쇠락

그러나 그녀의 이런 노력에도 나칼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스승 토라비는 어느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든지 사람들은 너를 실망시킬 거야.”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뭘 찾고 있지? 뭘 말하고 있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 페르도우시(나칼리의 주 이야기인 이란 서사시 <샤흐나메>의 저자)가 도대체 뭔데?” 스승의 말처럼 나칼리는 화려한 시청각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급증으로 사람들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있다. 하비비의 나칼리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조차, 이란 문학은 먼 이야기이다.

그들이 나칼리로 주로 들려주는 이야기 <샤흐나메>는 10세기 페르도우시Ferdowsi라는 시인에 의해 쓰인 장대한 서사시다. 이란 역사의 큰 분기점인 7세기 아랍 침략 이전 페르시아 왕들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은 이란인들로 하여금 아랍침략 전 자신들의 역사가 얼마나 풍요로웠는지를 되새기게 한 작품이었다. 더구나 페르시아어 문자가 아랍문자로 대체되고, 아랍어가 유행하는 와중에 순수 페르시아어로 쓰인 이 작품은 자칫 끊길 법한 언어와 문학을 지켜준 든든한 페르시아의 문학과 언어의 보고였다. 토라비는 제자 훠테메에게 말한다. “만약 페르도우시가 없었다면 우리에겐 문학이란게 없었을 거야.”

04. 여성 나칼인 훠테메는 가장 주목받는 나칼인 동시에 금기를 깬 나칼이다. ⓒ유네스코(UNESCO) 05. 훠테메와 스승 토라비가 나칼의 고됨과 나칼리의 어두운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유네스코(UNESCO) 06. 이란의영웅이야기를담은왕서(王書), 『 샤흐나메』. 10세기에 활동했던 시인페르도우시가 쓴 이 란 서사시로, 나칼리에 주요 테마로 사용된다.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야기

이야기란 무엇일까? 도대체 이야기가 왜 중요한 걸까? 이쯤에서 다시 천일야화를 되새겨 보자. 천 하룻밤이 지나 셰헤라자드는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금님께서는 계집 때문에 재난을 만나시어 큰 욕을 보셨으나, 그 옛날 코스로의 대왕들도 임금님보다 훨씬 지독한 재난과 슬픈 불행을 맛보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주와 왕후, 군자 등 고귀하신 분들이 여인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욕을 당하신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왕은 그녀의 말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되고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셰헤라자드가 이야기로 왕을 구한 탓에 그녀는 많은 여성 백성들을 압제와 살육에서 구해낸다. 이야기가 한 사람과 한 세상을 구원한 것이다.

혹자에 의하면, 이야기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들었을 때 그 효과가 더 크다고 한다. 언어가 더 직접적으로 몸에 새겨지고 한정된 감각으로 이야기를 경험하는 탓에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고유하게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칼리를 통해 들려주는 <샤흐나메>의 풍부한 이야기들은 긴 시간동안 이란인들 삶에 각기 다양한 빛이 되어왔다. 핵협상 타결로 30년 넘게 닫혀있던 이란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지금 샤흐나메는 이란인들에게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 우리에겐 삶을 살아가는데 빛이 되어 줄 이야기가 필요하다. 더불어 빛이 되는 이야기를 주변에 실감나게 펼쳐낼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것이 나와 내 주변을,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가장 큰 버팀목일지도 모른다. 나칼리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보호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나칼리가 던져주는 이 같은 지혜를 깊게 되새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 최승아 (이란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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