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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존여비가 아닌 공경에 기초한 조선시대 부부관
작성일
2015-05-0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942

남존여비가 아닌 공경에 기초한 조선시대 부부관.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건 정말로 큰 인연이 있어야 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더구나 부부로 만난다는 것은 전생에 억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관련 통계에 의하면 20대 커플의 평균 연애기간은 100일 이내라 하고, 또 2014년에만 30만 5천 여 쌍이 결혼해서 무려 11만 5천 여 쌍이 이혼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풍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시대 부부관계와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며 오늘날 우리들의 부부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다

우선 조선시대 부부들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예禮를 중시했다. 상대방을 대할 때 예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만 알고 있으나, 예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겉으로만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퇴계 이황을 들 수 있다. 첫째부인 김해 허씨를 잃은 퇴계는 31살에 둘째부인 안동 권씨와 재혼했다. 그런데 권씨는 정신이 혼미한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퇴계는 17년 동안 권씨와 함께 살면서 권씨를 나무라거나 홀대한 적이 결코 없었다. 또 그의 나이 46세 때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을 뿐 아니라 전처소생의 두 아들에게도 친어머니와 같이 시묘살이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권씨의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진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며 아내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01. <회혼례도>. 회혼례는 해로한 부부의 혼인 예순돌을 축하하는 기념잔치로, 늙은 부부가 혼례의 복장을 갖추고 혼례의식을 재연하며 자손들의 헌수(獻壽)를 받고, 친족·친지들의 축하를 받는다. ⓒ국립중앙박물관

 

부부간 소통을 중시하다

조선시대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부부생활이 대단히 고정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부부들도 수학이나 관직, 유배, 근친覲親, 여행 등의 이유로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부부사랑은 쉽게 식지 않았는데, 평소 시나 편지로 끊임없이 안부를 묻거나 사랑을 표현하며 서로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였다.

16세기 학자이자 관료인 미암 유희춘은 근친과 유배, 관직 생활 등의 이유로 자주 부인 송덕봉과 떨어져 살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 ‘지우(知友: 나를 알아주는 친구)’라고 여길 정도로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시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조 2년(1569) 2월이었다. 당시 미암은 외교 담당 부서인 승문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숙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비가 오다가 눈으로 바뀌면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덕봉은 미암이 못내 걱정스러워 새로 지은 비단 이불과 평소 입는 외투인 단령을 보자기에 싸서 갖다 주도록 했다. 뜻밖의 물건을 받은 미암은 크게 감동했는지 임금이 하사한 술상과 함께 이러한 시를 지어 보냈다.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 그대가 추운 방에 앉아있을 것을 생각하노라 / 이 술이 비록 하품下品이지만 /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으리’ 그러자 덕봉도 모처럼 시심詩心을 발휘하여 이러한 화답시를 지어 보냈다. ‘국화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 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으니 / 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소’ 그날 밤 미암이 6일 만에 퇴근하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는데, 일기를 보면 서로의 반가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02.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퇴계종택. 퇴계 이황의 종가로, 이황은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아내를 나무라거나 홀대한 적이 없었다. ⓒ문화재청 03. 보물 제260호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 유희춘은 유배, 관직 생활 등의 이유로 자주 부인 송덕봉과 떨어져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끊임없이 시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문화재청

 

적극적인 사랑표현

조선은 유교사회로 희로애락 등 인간의 감정을 최대한 숨겨야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특히 부부간의 애정표현은 더욱 금해야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부부들은 의외로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며 다정다감한 부부생활을 했다. 심지어 부부간의 성문제에 있어서도 의외로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먼저 퇴계는 앞에서처럼 부부간에 서로 예를 지킬뿐 아니라 손님처럼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적인 자리에서이고, 사적인 자리, 특히 잠자리에선 서로 다정다감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원이엄마의 한글편지(1998년 안동의 한 무덤에서 발굴)를 보면, 이들 부부는 평소에도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던 듯하다. 예컨대 부부간 잠자리에서 원이엄마가 ‘이보소!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라고 하니, 남편 이응태가 ‘둘이 머리가 새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현재의 부부들도 쉽게 하기 어려운 애틋한 사랑표현이 아닐 수 없다. 추사 김정희의 경우도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비록 집밖에 나와 있어도 한결같이 당신을 생각한다’고 말하거나,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 끝이 없다’라고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04. 원이엄마의 한글편지.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들은 평소에도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음을 알수 있다. ⓒ안동대학교박물관 05. <평생도> 중‘ 혼인식’ 장면. 말을 타고 가는 신랑 신부의 행렬을 그린 것이다. 강에는 원앙이 한 쌍 노닐고 있어 신랑신부의 금슬을 기원하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강 주위의 물이 오른 버드나무와 집안에 만개한 살구꽃으로 보아 봄임을 알수 있는데, 이는 인생의 시작을 의미하는 혼례식의 이미지와 상통하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나를 알아주는 친구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은 나를 알아주는 친구인 지우知友였다. 더 나아가 서로를 키워주는 관계인 인생동료가 되고자 했다. 예컨대 18세기 남대문 밖의 한 서당 주인이었던 윤광연은 아내 강정일당을 부인이자 벗이요, 스승처럼 여기며 살았다. 정일당이 그의 학문이나 서당일, 일상생활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조언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한평생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나에게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격려하였고, 나에게 한 가지라도 허물이 있으면 걱정하여 문책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나를 중도의 바른 자리에 서게 하며, 천지간에 과오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내가 우둔하여 다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 이 때문에 부부지간에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이 했고, 조심하고 공경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매번 그대와 마주할 때는 신명을 대하는 것과 같았고, 그대와 이야기할 때는 눈이 아찔하였다. 그래서인지 윤광연은 정일당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남긴 글들을 모아 문집을 간행했다. 또 주변의 이름난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서문이나 행장, 묘지 명, 발문 등을 받음으로써 그 문집의 가치를 더욱 빛내려 했다.

또한 18세기 서유본과 이빙허각 부부는 서로를 키워주는 인생 동료이자 학문적 동료였다. 여 성실학자였던 이빙허각은 한글로 된 가정백과서 『규합총서』를 집필했는데, 이 책을 쓰는 데 있어서 남편 서유본의 역할은 정말로 컸다. 평소 그는 빙허각과 함께 옛 책을 읽으며 진지하게 토론해주었다. 책을 쓸 때도 늘 곁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주고, 궁금한 것을 실험할 때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은 남들에게 물어서 알려주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규합총서』를 쓴 뒤에는 시를 지어 축하해줄 뿐 아니라 그 책의 제목까지 지어줬다. 이에 따라 빙허각은 해마다 사시사철 피어나는 100가지 꽃잎을 따서 술을 빚는 이른바 ‘백화주百花酒’를 담아 남편에게 대접했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도 역시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만 누워 있다가 「절명사絶命詞」 한 수를 남기고 남편을 따라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인생의 동료이자, 더 나아가 학문적 동료이기도 했다.

현대의 부부관은 너무 외형적이고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가깝다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또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은근하게 포용해주는 마음을 잃고 말았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조선시대 부부관을 통해 좀 더 상대를 배려하면서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부부생활을 해나갔으면 싶다.

 

글. 정창권 (고려대학교 교양교직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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