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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1운동 90주년 진관사 칠성각 뒷벽에서 발견된 ‘불교독립운동’
작성일
2010-03-0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6509




불교 독립운동의 실체와 사료적 가치

칠성각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굴된 진관사 소장 등록문화재는 1919년 개별사찰의 항일 독립운동 참여와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불교의 관계를 확인 시켜준 사료로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은 새로 발굴된 것이다. 진관사 독립운동 일괄문화재는 일제 침략으로 굴절됐던 근세 불교 역사와 궤적을 달리했던 한국불교의 독립운동을 밝히는 실증자료로 불교학계는 높이 평가한다. 진관사 등록문화재를 검토한 신용하 서울대명예교수와 문명대·김광식 동국대교수는 진관사가 1919년 독립운동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 모금 및 운송을 담당했던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서울 불교 연락본부’로 추정하고 그 주역이었던 백초월스님을 재조명해야한다고 주장 했다. 1919년 불교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재조명되는 북한산 자락의 진관사는 고려 8대 현종이 1011년에 창건한 고찰로 이성계가 건국 과정의 살육을  참회하기 위해 수륙재를 베풀었던 고려·조선 두 왕조의 중요 사찰이었다. 서울근교 4대 명찰의 하나였던 이 절은 6·25 전란으로 나한전羅漢殿, 칠성각七星閣, 독성전獨聖殿 등 3동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소했다. 구한말 중창한 칠성각을 2009년 보수하던 중 독립운동 사료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일제하 한국불교의 독립운동을 밝힐 진관사 등록문화재의 실체와 사료적 가치를 조명한다.


1919년 대한독립을 선언한 ‘태극기’

눈길을 끈 진관사 태극기는 가로 89㎝, 세로 70㎝로 상해 임시 정부가 제정한 국기나 현재의 국기가 가로:세로 비율이 3:2인 것과 달리 5:4로 세로가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4괘는 임시정부가 제정한 4괘와 동일하나 현재의 태극기와는 배치 위치가 다르다. 태극의 색깔은 현행 태극기와 같지만, 1890년 고종이 데니 외교고문관에게 하사한  태극기와 같이 굴곡이 매우 심하며 그 위치도 현재의 국기를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데니 태극기와 마찬가지로 바탕천에서 태극 부분을 도려내고 다른 천으로 만든 태극을 정교하게 박음질해 덧붙였다. 광목천 흰색이 변질되었으며 왼쪽 윗부분의 끝자락에 불에 탄 흔적과 찢긴 부분이 보인다. 함께 발굴된 조선독립신문 제호의 태극기 문양과 동일하다. 칠성각에서 나온 임정 독립신문30호에는 태극기 찬양시讚揚詩, 32호에는 김두봉의 태극기 해설과 제작 기법이 실려 있다. 1919년 독립운동 당시 사용한 태극기를 발굴한 것이다.




상해 좌파반대 설득과 태극기를 홍보한 독립신문들

방금 인쇄한 신문처럼 양호한 보관 상태로 태극기 속에서 나온 독립신문들은 1919년 6월부터 12월까지 상해와 서울에서 발행된 5종 20점이다. 상해에서 발행된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임시정부를 비판한 신채호의 신대한新大韓, 천도교가 서울에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동시에 발행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등사판 지하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조선노동회경성단’이 선언한 ‘경고문’은 1919년 한국인의 다양한 독립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일제日帝 헌병통치하에서 언론 활동은 봉쇄돼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와 경남매일慶南 每日만이 발행되었다.

상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은 타블로이드판보다 약간 작은 판형(33.5cm x23.4cm)으로 4면 체제다. 1919년 12월 25일자 제32호는 ‘신뢰하라 용서하라’는 권두사설을 통해 임정의 단합을 강조했다. 이승만대통령의 축전, 임정 일부 세력의 불협화음에 대한 해명기사 등을 1면에 실었다. 1919년 8월 21일 창간, 주3회(화·목·토)발행했던 독립신문 32호는 31호 발간 후 3주가 지체된 것을 사과하는 사고社告를 실었다. 11월 25일자 제30호 ‘군자와 소인’ 권두사설은 “소인배처럼 독설만 하지 말고 군자처럼 난국을 수습하자”고 주장했다. 국기 찬양 시 ‘태극기太極旗’와 ‘개천절의 감언開天慶節의 感言’이라는 해설도 게재되었다. 신용하 교수는 독립신문 30·32호는 진관사 백초월白初月 대선사(1878~1944·건국포장)가 1919년 개천절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종로 삼청동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걸고, 임정 수립 ‘축하문’, ‘선언서’,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한 독립운동과 관련 있는 자료라고 해석했다. 신교수는 이 등록문화재를 임정 독립신문 국내 배포, 태극기 계몽 등을 진관사에 맡겼던 증거물로 해석했다.




사회주의혁명 역설, 외교노선 비방한 신채호의 신대한新大韓 1~3호

활판인쇄 신문 신대한 1~3호 중 2호와 3호는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신대한新大韓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기자·주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권업신문勸業新聞 대양보大洋報 주필을 역임한 단재 신채호가 임시정부 이념을 비판 하고 1919년 10월 28일(화요일) 창간한 신문이다. 창간호(37.2x54.5cm) 1면에는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의 시위 사진도 크게 실었다. 단재는 창간호에 “민족 전쟁은 1차 대전 종결로 일단락을 지었고 마르크스 이론에 의한 계급전쟁이 새로운 흐름”이라는 창간사를 실었다. 1919년 11월 3일(월요일) 발행한 신대한 제2호(37.5x 54cm)는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정면 반박하는 의견기사를 머리기사로 다루고 6건의 국내 독립운동기사를 싣고 있다. 1919년 11월 12일(수요일)자 신대한 제3호(36.5x55cm) 머리기사는 11월 4일 사망한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부음기사다. 3대 통감과 초대총독으로 조선인 살상과 경제침탈을 자행한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준엄하게 성토했다. 일제 경성법원의 독립운동가 재판을 1면에 기사화했으며  여러 기생들과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수원기생 김향화(23)양의 가출옥 기사도 보인다. 신채호 노선의 독립운동이 국내 불교계와도 연결됐음을 알려준다.


 

3·1운동 홍보지 조선독립신문과 독립의식 고취한 자유신종보

조선 독립신문朝鮮 獨立新聞은 천도교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인쇄와 동시에 발행한 지하신문으로서 3·1운동 홍보 역할을 했다. 천도교 계열의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사장, 이종일李鐘一이 주간으로 제1호는 1만장을 보성사에서 인쇄하여 배포했다. 윤익선사장이 체포되자, 이종인李鐘麟 이 2~4호까지 발행하였다. 진관사 소장 조선 독립신문 호외 32호(1919.6.6), 40호(1919.8.12), 41호(1919.8), 42호(1919.8.20)는 발행인을 바꿔가며 필경 등사로 발행되었으며 32호와 40호는 처음 공개된 것이다. 필경 등사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제4호, 제7호, 제12호 3장은 모두 새로 발견된 것이다. ≪우남 이승만 문서≫에 16호가 수록돼 있다. 제 4호에 ‘자치파 정상自治派 頂上에 일침一針을 하下함’이란 제목의 사설로 자치론자를 이완용 송병준에 비유하며 최강, 박병철, 한기두, 고희준, 유문환, 박승빈, 윤희정을 거명하며 비판했다.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과 자치론 비판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의견기사도 실었다.

 
 

항일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진관사 소장 등록문화재는 1919년 한국불교의 독립운동을 밝힐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자료다. 독립운동사가들은 진관사 마포포교당(극락암)에 은신했던 항일 지하신문 혁신 공보革新公報사장과 중앙학림 한국민단본부 단장을 역임하며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백초월(白初月· 1878~ 1944 ·건국 포장)스님이  1919년 진관사에서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불교인들과 연결되 자금모금, 시위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세에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한 백초월스님은 1909년에는 범어사 강원에서 성도기成道記를 발표했고 1910년 친일승려들의 이른바 조동종맹약을 반박한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에도 참여했다. 1919년 4월 한국민단 본부 단장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2천원, 만주 독립군에도 수백원의 자금을 제공 했다. 명진 학교 교장, 동학사·월정사·봉원사강사로 활동했던 백초월선사는 한용운, 백용성 스님에 버금가는 항일 독립운동 승려였다. 일제하 한국불교를 바르게 정리하기 위해 진관사와 백초월선사의 독립운동과 임정과의 관계를 밝혀야 할 것이다.  


글·박석흥 문화재위원, 건양대 겸임교수  
사진제공·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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