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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광주 양림동 빛고을 밝히는 빛바랜 풍경
작성일
2024-01-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22

광주 양림동 빛고을 밝히는 빛바랜 풍경 마을 어귀에 한 그루 서 있기만 해도 마음 든든해지는 것이 버드나무인데 버들 양(楊)에 수풀 림(林) 그 이름처럼 한때 버드나무가 무성히 숲을 이루었다는 광주 양림동은 얼마나 푸르르고 푸근한 마을이었을까. 그 옛날의 버드나무는 이제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양림동은 여전히 푸르르고 푸근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백여 년 전 양림동에 뿌리내린 선교사들과 그때로부터 형성된 문화적 유산이 양림동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깨인 양반가 동네에 자리 잡은 선교사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절대적인 인상이 아로새겨져 있는 광주이기에 백여 년 전 근대의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오늘의 양림동은 어쩌면 상당히 의외의 풍경일지도 모르겠다.1897년 개항과 함께 전라남도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된 곳은 목포였다. 그 후 선교 활동을 확장해 광주로 들어오게 된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저리에 자리를 잡았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었던 때였기에 기독교는 어느 지역에서나 배척과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양림동의 뒷동산 격인 해발 108m 야트막한 양림산 기슭이 풍장터였던 것은 선교사들에게는 호재였다. 사람들이 살기 꺼렸고, 자연히 땅값은 저렴했다. 한편 양림동에는 이장우 가옥, 최승효 고택과 같이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옥과 선교사들이 지은 양옥과 이웃하고 있는데, 당시 영향력도 있고 이른바 ‘깨인’ 양반들이 이곳 양림동 일대에 살고 있었던 것도 선교사들에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되었다고 한다.


01.최승효 고택 02.양림교회

빛고을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한 양림동

양림동 근대 여행의 출발점은 양림교회다. 붉은 벽돌조에 뾰족한 첨탑을 인 양림교회는 1904년 ‘전남 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이 설립한 광주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50년대에 신축된 현재의 예배당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양림동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근대기 양림동을 상징하는 장소다. 양림교회 곁에 위치한 오웬기념각은 유진 벨과 함께 광주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한 오웬(Clement C. Owen)과 그의 할아버지를 위해 조성한 건축물이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오웬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과로로 타계하게 되는데 그가 생전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할아버지 윌리엄을 위한 기념각을 건립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친지들이 광주로 성금을 보내오면서 1914년에 건립됐다.


오웬기념각은 겉에서 보면 반듯한 정사각형 건물인데 내부는 상당히 입체적이다. 한쪽 모서리에 마련한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석은 좌우대칭이 되도록 배치했고, 바닥은 전체적으로 설교단을 향해 경사지게 해 모든 시선이 설교단으로 집중되게 하는 구조다. 애초에 예배나 집회에 적합한 장소로 설계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오웬기념각은 예배당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때 광주 지역 연설이 이곳에서 울려 퍼졌고, 1920년에는 광주 최초의 서양음악회인 김필례 피아노 독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1934년에는 독일 출신의 간호사 서서평의 장례식이 오웬기념각에서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오웬기념각을 비단 기독교 문화유산으로 묶을 수 없는 이유다. 오웬기념각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03.우일선 선교사 사택 04.수령 400년이 넘은 호랑가시나무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1908년에 제중원(현재의 광주기독병원) 2대 부원장으로 부임한 윌슨(Robert M. Wilson)이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회색 벽돌조의 2층 주택이다. 우일선은 윌슨의 한국명이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이름 그대로 윌슨과 그 가족의 보금자리였다. 근대기 우리나라에 등장한 서양식 건축물이라 하면 붉은 벽돌조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앞서 소개한 오웬기념각과 우일선 선교사 사택 등 양림동의 근대 건축물 상당수는 회벽돌 마감이 도드라진다. 윌슨은 이 사택에서 장애가 있거나 버려진 아이들도 함께 돌본것으로 알려졌다. 마당 한편 나무에 매여 있는 투박한 나무그네를 보고 있으니 그 옛날 이 마당에서 뛰놀았을 아이들의 모습이 피어오른다.


05.윈스브로우 홀 06.수피아 홀

선교사들의 땀방울이 싹틔운 희망, 그 흔적들

지금은 곳곳에 선교사들이 건립한 근대 건축물이 양림동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들이 선교를 시작할 무렵 양림동은 특별한 것 없는 동네였다. 선교사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거목이자 희귀 수종인 호랑가시나무(광주광역시 기념물) 언저리를 본거지로 삼고 선교 활동을 전개했고, 호랑가시나무 주변에 그들의 고향에서 들여온 다양한 수목을 심어 일대를 정원으로 조성해 소중히 가꾸었다고 한다. 그 후 수령 4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호랑가시나무는 아이러니하게 버들숲 양림동을 상징하는 나무가 됐고, 사람들은 우일선 선교사 사택 일대 양림산 자락을 ‘호랑가시나무 언덕’으로 부르기에 이른다.호랑가시나무 언덕길 따라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정에 들어섰다. 유진 벨 선교사가 교회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1908년 광주여학교 설립으로 이어졌고, 1911년 기부금으로 새 교사를 지으며 교명이 수피아여학교로 바뀌었다. 광주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가 이 수피아여학교의 후신이다.


중학교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윈스브로우 홀, 예배당으로 유지되고 있는 커티스 메모리얼 홀, 고등학교 교사로 활용되고 있는 수피아 홀 등 세 건축물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3·1만세운동에 나서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학생들의 공간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만큼 교정은 그 자체로 역사의 현장이 된다. 낯선 방문객을 마주하고도 햇살보다 말간 얼굴을 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학생들과 조우하며 빼앗긴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때, 배움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라고 여겼던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땀방울이 어떤 희망을 싹 틔웠을지를 떠올려 보게 된다.


양림동 둘레길은 윌슨길, 오웬길, 카딩톤길, 브라운길 등 양림동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길이 갈래갈래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이 한데 모이는 가장 양지바른 곳에 이르러 양림동 선교사 묘역을 마주한다. 풍장터였던 양림산 자락을 사람을 돌보고 거두는 터전으로 변화시켰던 그네들이 여기에 잠들어 있다. 종교를 뛰어넘어 인류애를 실현한 그들이기에 가만히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게 된다. 버드나무 없이도 푸르고 든든한 오늘날의 양림동으로 토대를 다져준 데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 서진영(『하루에 백 년을 걷다』 저자) 사진.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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