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상거래를 통해 상업을 활성화한 직업
- 작성일
- 2023-12-0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523
사고 파는 행위를 이어주다
상업이 발달했던 조선 후기에는 ‘거간꾼’이라고 하여 중개 업무를 맡은 자들이 나타났다. 거간꾼은 전통 상거래라면 어느 분야에나 있었는데, 대표적인 거간꾼이 집주름(가쾌)과 소거간꾼이다.
집주름은 지금의 부동산 중개업자로, 집의 매매를 중개했다. 조선 후기에 서울 인구가 늘어나 집을 사고파는 일이 많아지면서, 18세기 중반부터 생겨난 직업이다. 집의 매매 과정은 요즘과 비슷하여 집주름의 중개로 거래가 이루어지면 계약서를 쓰고 선금을 주고받은 뒤, 초가집은 15일, 기와집은 20일 안에 잔금을 치르고 입주했다. 신택권의 「성시전도시」(1792)에는 집주름이 큰집 작은집 가리지 않고 중개해 주고, 한 집이 이사하면 열 집이 움직이며,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수수료로 받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심노숭의 『자저실기』(1830)에는 순조 때 대사헌을 지낸 이익모가 179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집주름을 불러 서울 남촌과 북촌에서 가장 좋은 집을 소개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얼마 뒤 그는 상동에 있는 청주목사 홍선양의 집을 샀는데, 그 값이 무려 7,000냥이었다. 집주름은 조선 후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복덕방이 등장하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소거간꾼은 조선시대 우시장에서 소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개인이다. 소는 오랜 옛날부터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에 일반 시장과 함께 우시장은 늘 사람들로 붐비고 거래가 활발했다. 소거간꾼은 우시장 안에 소를 묶어 놓는 말뚝을 몇 개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소를 파는 사람이 우시장에 오면 소를 말뚝에 묶어 놓고 일종의 입장세라 할 수 있는 ‘말뚝세’를 냈다. 그다음엔 소거간꾼이 소를 살 사람을 데려와 소를 구경시켰다. 뿔이 곧게 뻗고, 짧은 털에 윤기가 흐르며, 가슴께가 너르고 잔등이가 소박한데다, 엉치가 네모로 올라가 붙은 소가 좋은 소라고 한다.
그리고 뿔이 벌어지고 발을 절거나 점박이인 소, 등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며 엉치가 홀쭉한 소는 나쁜 소라고 한다. 흥정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면 소거간꾼은 수수료를 받아 챙겼는데, 그 금액은 거래액의 100분의 1이나 2 정도였고, 소를 파는 사람이 내는 것이 관행이었다. 우시장에서는 외상 거래가 없고 현금 결제가 원칙이었다.
소거간꾼은 전국적으로 시장이 확대되었던 16세기 중엽에 나타나, 시장이 전국에 1,000여 개에 이르던 18세기 중엽부터 활발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9세기경 전국 1,052개 시장 가운데 우시장이 184개였다. 소거간꾼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의 우시장이 588개였고, 거간꾼의 수가 1만 5,000여 명에 이를 만큼 성업 중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가축 거래를 경매제로 전환하면서 소거간꾼은 설 땅을 잃어갔다.
거간꾼은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직업이었다. 큰돈이나 가게가 필요 없고, 거래를 이룰 만한 능력과 인맥, 적극성, 언변만 있으면 그 일이 가능했다. 나이나 학력,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종사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직업만의 장점이었다. 조선시대에 거간꾼이 중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상업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었다.
글. 신현배(역사 칼럼니스트, 아동문학가) 일러스트. 박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