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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라를 지키고자 했던 십이지, 그리고 신라왕릉
작성일
2018-05-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731

신라를 지키고자 했던 십이지, 그리고 신라왕릉 경주에는 유명한 유적지와 문화재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라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하여 최근 정비가 매우 잘 되어 있는 동궁과 월지에는 주말이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발굴 조사가 한창인 월성 또한 신라왕경 복원의 중심에 있는 유적지이다. 특히 신라 문화의 보고인 국립경주박물관은 국보·보물 등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신라의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막상 이 화려한 시대를 이끈 신라 왕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은 왕경 중심지에서 조금 비켜서 자리하기 때문인지 찾아보는 이가 드물어 한적하다 못해 쓸쓸함마저 느껴진다. 이 쓸쓸함 속에서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굳건히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왕릉 주위에 십이지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인들이 영원히 지키고, 남기고자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01, 02. 경주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 조각.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호석은 봉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넘어 장식의 기능을 더하게 되는데, 장식이라 함은 주로 십이지신상을 말한다. ⓒ경주시 03. 통일신라시대 석제 십이지신상 중 원숭이 ⓒ국립중앙박물관
04. 평복의 십이지를 호석에 새겨 넣고 능묘 둘레 땅속에 무복의 납석제상을 묻은 경우는 김유신 장군묘가 대표적이다. ⓒ경주시

호석(護石), 둘레돌이 남기는 의미

신라왕릉 초입에 들어서면 나이가 제법 든 소나무들이 따뜻하게 감싸고 그 안에 드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평온함과 고요함을 넘어서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양 옆에 자리한 석인상을 지나 배례공간으로 들어서면 무덤 정면에 커다란 상석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호석에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사자가 왕릉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왕릉은 40여 기이며, 그 가운데 십이지상 등 왕릉 조각이 남겨진 예는 10여 기 정도이다. 우리나라 고대 무덤에서 호석(護石)은 삼국시대 고구려 광개토왕릉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사각형으로 봉분을 조성한 후 장방형의 호석을 설치함으로써 봉분이 무너짐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는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호석이 관찰되고, 신라에서는 중국식 묘제가 채택된 태종무열왕릉(경주무열왕릉)부터 하단에 둘레돌을 두어 봉분의 외부를 보호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호석은 봉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넘어 장식의 기능을 더하게 된다.

장식이라 함은 주로 십이지신상을 말하는 것인데, 환조(丸彫)의 십이지신상을 호석 바깥 회랑에 세운 성덕왕릉을 제외하면 주로 호석을 구성하는 탱석(기둥역할)에 부조로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보호기능과 장식성을 띤 호석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다. 개성 부근의 고려왕릉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나 장식을 위한 조각 수법 등은 매우 떨어진다. 이후 고려후기를 넘어서 조선시대까지도 왕릉에 호석이 설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그 안에 장식은 십이지가 아닌 모란 등이 양각되기도 하였다.

05.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성덕왕릉은 호석을 설치하고, 그 안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가장 이른 예이다. ⓒ경주시 06. 경주 흥덕왕릉에는 무복을 한 납석제 십이지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경주시 07. 통일신라시대 석제 십이지신상 중 뱀 ⓒ국립중앙박물관 08. 통일신라시대 석제 십이지신상 중 토끼 ⓒ국립중앙박물관 09. 중국식 묘제가 채택된 태종무열왕릉(경주무열왕릉) ⓒ경주시
호석 護石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려고 돌을 이용하여 만든 시설물. 열석(列石)이라고도 한다. 호석의 발생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베리아의 쿠르간묘의 석축(石築)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 광개토왕릉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십이지, 신라 무덤세계에 등장하다

십이지가 처음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중국 한대(漢代)이다. 그 구성은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이며, 그 이후 수대(隋代)의 동경(銅鏡)에 나타났다가, 수두인신(獸頭人身), 즉 머리는 동물이고 몸은 사람의 형태가 확립된 것은 당대(唐代)이다. 중국당대에는 묘지 내부에 환조의 형태로 십이지용(十二支俑)을 조성하여 묘주에게 배례하는 모습으로 부장(副 葬)되어, 묘주에게 예를 다한다는 평범한 성격을 지니는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당의 문화가 통일신라에 유입되면서 8세기 중엽 경에 당나라 형식인 십이지용이 청동으로 제작되어 경주 용강동고분의 무덤 안에 배치 되기도 하였다. 무덤 내부에 배치하는 형식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었던 것 같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수호하는 신장상의 성격을 확립하여 무덤 밖으로 나오게 된다. 십이지신상의 시원은 비록 중국 당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동아시아에서 십이지신상을 무덤의 호석에 배치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신상의 의미는 신라만이 가지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이런 형식으로 호석이 설치되고, 그 안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가장 이른 예는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성덕왕릉(사적 제28호)이다. 성덕왕릉은 왕릉의 조성시기와 십이지 신장상의 조각 연대가 일치하지는 않아 십이지 신장상의 조성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조각 수법이나 십이지신상에 나타나는 갑옷의 형태 등을 미루어 볼 때 8세기 후반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되어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대 무렵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속의 영령을 지키는 수호신, 십이지

십이지는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했다. 이 열두 짐승은 중국 당대의 문헌이나 십이지용의 형태를 봐도 시간과 방위의 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는 불교 국가로서 불법을 수호하고, 방위의 신으로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불탑에 새겨 넣어 불 사리를 수호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왕릉에서도 통일신라에 이르러 십이지신상에 사천왕상의 무복을 차용하여 신장상으로 발전시켜 능묘의 외부에 새겨 넣은 것은 불탑에서의 사천왕상 등이 불법을 수호하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으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에 나타나는 십이지 신장상은 환조, 부조의 형식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십이지 신장상은 부조이나, 성덕왕릉의 십이지 신장상만이 환조로 구성되어 있다. 부조로 조성된 십이지 신장상은 복장으로 또다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평복과 무복, 그리고 호석에는 평복을 한 십이지 신장상을 새겨 넣고 능 주변에 무복을 한 납석제 십이지 신장상을 방위에 따라 묻은 형식이다. 평복은 헌덕왕릉과 김유신장군묘에서, 무복은 흥덕왕릉, 원성왕릉(괘릉) 등 대부분의 왕릉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평복의 십이지를 호석에 새겨 넣고 능묘 둘레 땅속에 무복의 납석제상을 묻은 경우는 김유신 장군묘가 대표적이다. 평복을 입은 십이지 신장상과 무복을 입은 십이지 신장상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뚜렷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평복을 입은 십이지 신장상 역시 무기를 쥐고 한쪽을 향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복을 입고 있는 십이지 신장상과 마찬가지로 평복을 입은 십이지 신장상도 무덤 주인의 영령을 수호하고 그와 동시에 시간과 방위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신라왕릉에 십이지 신장상을 둘러 배치한다는 것은 신라 왕권을 확립하고, 강화된 전제왕권을 수호하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묘주의 영면과 동시에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신라인들의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글. 박방룡(신라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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