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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느림과 비움의 춤사위-처용무
작성일
2009-04-1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213





설화 속에 피어난 덕德의 춤

처용무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예술성이 뛰어나고 독특한 양식을 지닌 궁중무용으로 민간설화에서 잉태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 전통무용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춤이다. 문화재 관리국의 문헌에 기록된 처용무의 가치는 첫째, 처용무는 발생하여 천여 년을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온 연원과 경로가 비교적 정확성을 지닌 계통 있는 춤이며 둘째, 긴 연륜을 전해오는 동안 많은 기복과 변천을 거듭하면서 창출·형성된 춤으로 독특하며 다형적으로 발달되어 풍부한 예술성과 독특한 가치를 지녔으며 셋째, 처용무의 발생으로 파생된 여러 가지 설화들이 우리 민족사 속에 남아 있어서 과거 우리의 생활 문화와 정서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넷째, 우리의 고유한 가사와 악곡 또는 불사와도 일련의 관계를 맺고 있어 사적인 면에서도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춤이 잉태된 설화는 참 대단히 멋진 처용의 면모에서 비롯된다. 용의 아들인 처용에게 왕께서 급간이란 벼슬을 주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었다. 그의 아내가 심히 아름다워 역신(전염병 귀신)이 흠모하여 밤에 그 집에 이르러 몰래 그녀와 동침했는데 처용이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음을 보고 “동경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언고 본대 내해다만은 빼앗겼으니 어찌하리꼬” 라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그 방을 물러 나왔다. 역신이 처용의 덕에 감탄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제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하여 범하였는데 공께서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으리이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그려 문에 붙여 사귀를 물리치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의 민족사상이 내포된 처용사상은 덕과 관용으로 마음을 감화시키고 승복시키려는 정신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거나 물리적, 혹은 직설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감으로 계시하려 하고 있다. 곧 그것은 싸움을 싫어하는 온유한 우리국민의 심성을 표출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처용무의 기원과 시대적 변천 원시무용은 종교 무용적이고 주술적인 요소가 있다. 한국전통무용의 발생도 역시 의식적이며 종교적인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창제되었다. 처용은 주술적인 의미와 민중들의 의식이 표출된 원시가면무가 신라대에 계승되어 당시 사람들의 유일한 신앙인 불교적인 교리 내지는 용신사상과 결합되어 처용이란 명칭을 띠고 전해진 것이란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왕권강화의 행사나 구나의식과 더불어 불교적인 신앙의 색채를 띤 국가행사에서 연희되었다. 이때부터 처용무는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연행한 흔적이 보이고 고려 말까지 470여 년간을 계속 끊이지 않고 1인 처용무로 추어졌다. 조선시대로 전승한 처용무는 오방처용무로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일종의 구나 뒤에 행해져 나례의식과는 엄밀하게 구별되었다. 이때 처용무는 전도와 후도 두 차례에 걸쳐 추었는데 전도에서는 의식무용으로 오방처용무만 추고 후도에서는 학무, 연화대와 함께 오락적 요소를 띠고 연출되었다. 따라서 춤이 다양화되고 노래도 확대되었으며 연희진행의 절차도 대형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처용무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중단되는 비운을 당한 10여년 후인 1923년 순종 황제 50주년 탄신 축하공연을 위해 당시 이왕직 아악부에서 아악생들에게 학습을 시작한 것이 재생의 기회가 된다. 그 후 5년 간격으로 아악부에서 새로 모집하는 아악생들이 학습하여 전해졌고 해방 후는 구왕궁아악부와 1951년 아악부가 국립 국악원으로 개창되어 이어지면서 오늘의 처용무가 전해지게 된다. 처용탈과 의복 속에 숨겨진 비밀 처용탈 복두에 모란꽃과 복숭아 열매를 함께 삽식하는 것은 이는 신라의 설총이 꽃 중에 꽃이 모란이라고 하였고, 복숭아를 택한 연유도 중국의 무릉도원이라는 고화에 근거하여 복숭아를 열매중의 열매로 생각한 때문이다. 이렇듯 가장 귀한 열매와 꽃을 택한 것은 처용무가 그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 춤이기 때문이다. 귀고리는 왕공귀족계급에서 존재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하여 착용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길경과 천의는 제사장이나 교황과 같은 인물이 두르는 의물임을 생각하면 처용의 높은 권위적 차원의 존재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황상은 앞치마인데 황색으로 다섯 처용이 똑같이 입는 이유는 생명학에서 토의 바탕위에 음양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황색土을 본바탕으로 모두 덧입고 있다.

처용무에서 처용은 왜 탈을 썼으며 처용의 가면은 왜 다섯 명 모두가 한 얼굴로 나타나고 적색을 띠고 있을까? 그것은 설화 속에 나타난 처용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를 나타내며 처용은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인물이기에 단 하나의 얼굴로 표현된 것이고, 적색은 옛 부터 민속자료 속에 벽사의 의미를 지녔던 만큼 그 연유로 그대로 전습된 것으로 보여 진다.

오방의 처용이 모두 다르게 다섯 가지의 색으로 착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처용의 춤사위는 왜 5명이 모두 똑같이 움직일까? 그것은 동작하여 움직일 때 그 조화로써 음양 관계의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함으로 면밀히 계산된 것이다. 꽃신은 악학궤범에 따르면 오방이 모두 하얀 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백색은 밝음을 뜻한다. 자전에 의하면 백문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음이고, 백주는 밝은 대낮이며 백일은 햇빛이 밝게 비치는 날로 풀이된다. 동이족은 광명을 좋아하여 하얀색을 즐겼다. 조선의 백자 또한 희게 만들었던 것은 백의와 공통된 정서로 백색은 만인이 공감하는 지고의 멋과 미를 지닌 것이다. 한국인의 평민은 평상시 현세에서는 백색의 옷만을 입었으며 색채의 옷은 어린아이와 왕과 귀족의 경우 및 명절이나 혼인의 경우에만 입었다. 그것은 백색에 대한 동경이 이렇듯 처용의 신발을 하얀색으로 신은 것이다. 처용이 하얀 발을 딛는 곳곳마다 천지가 다 밝은 세상으로 변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한삼도 역시 하얀색으로 만든 것은 뿌리는 곳곳마다 자유와 영원을 꿈꾸는 하늘의 광명을 뿌려 밝음을 지향하는 하늘의 덕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처용의 복식에서 유독 손과 발을 하얀색으로 결한 것은 이러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공간작대의 심오한 철학 처용무는 10박속에 지닌 보법에서의 독창성과 공간구성형식에 있어서의 창작성, 가면과 복식을 통하여 보여 지는 표현성과 상징성 및 춤사위에서 보여 지는 활달하고 힘찬 역동성 등을 갖추고 있어 그 춤의 구도와 춤사위가 지닌 무상이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처용무의 공간작대는 파랑과 노랑, 빨강과 노랑, 흰색과 노랑, 흑색과 노랑이 상대하는 의미와 역할이 대대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방위를 설정하고 미적인 의미 이외에도 법적인 공식처럼 되어있는 오행원리의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처용무는 오방색을 통해 오행의 원리로 춤을 완성하고 있다. 이것은 어진마음(仁)을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으로 인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리로 인을 실현하는 데는 은인자중하여 동보다 정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외부로 노출시키는 것을 극도로 절제하고 정중동의 정수를 우리춤의 미학으로 완성시켰다. 처용무는 음양원리에 상응시켜 우주자연의 변화와 섭리와 이치를 공간구성과 색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태극과 음양과 오행을 가지고 우주의 원리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동시에 인간의 위치와 만물과의 관계를 논술하여 천인을 합일하려는 것으로 도덕과 윤리, 철학과 종교, 현실적 사회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을 기반으로 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인성에 관한 이법을 구명하여 실천함에 모순이 없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 전체가 처용무의 심오한 철학이다. 우리조상들은 춤 하나도 동양철학적 가치관에 의해 그 의미와 상징이 오묘하도록 만들었다. 느림과 비움의 춤사위 처용무에 대한 춤사위는 회무, 무릎디피무, 발바딧작대춤, 산작화무, 사방이무, 오방이무, 수양수무, 홍정도돔무, 낙화유수로 다른 어떤 정재에도 나타나지 않은 독특한 형태와 의미를 지닌 춤이다. 빈번한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신라에서 고려조로 계승되고 다시 조선조로 계승되어 궁중의 연악무로서 고관들이나 심지어 국왕까지도 처용무를 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성 혁명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대의 이질문화를 수용 계승한 이유는 무엇일까? 처용무는 단지 귀신 쫓는 의식의 가치로서만 그 존재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사상적 가치체계를 지니고 있었기에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용무는 한국 춤의 특질과 한국 춤의 전통사상과 철학을 가장 잘 보유하고 있는 춤이다. 우리 선조들은 각박함보다는 여유와 관용으로, 쫓기지 않는 느긋함으로 꽉 채우지 않는 비움의 철학으로 직설적이지 않은 은유의 법으로 날카롭지 않은 부드러움으로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으로 외형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처용무의 느림과 비움의 춤사위의 미학은 자연은 곧 우주이고 그 우주는 내 몸 안에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성찰을 위한 평정심을 가지게 되고 우주와 자연의 일치를 추구하는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여 내면의 본질을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우주의 기운과 합일이 이루어져 명상의 춤이 되는 것이다. 춤추는 인간의 몸은 선율과 박자 위에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빚어낸다. 춤이 흔들릴 때 세상은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홀연 시간 속에 순간 등장하고 순간 사라진다. 그래서 춤은 순간의 예술이요, 찰나의 예술이라 한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선인들의 지혜와 마음, 가치와 숨결로 이어져 온 처용무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 쌓여서 이루어 놓은 경험의 세계이고 곧 우리의 인식구조를 형성하게 한 뿌리이다. 이 춤은 우리의 전통 춤 중에서 스토리, 춤사위, 복식과 공간작대의 철학 등 많은 점이 우월하고 돋보이는 완벽함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우리문화의 뿌리와 전통이 자랑스럽다.

▶ 글·정은혜 충남대학교 무용학과교수 처용무 이수자 ▶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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